증발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일이다. 한순간에 사라지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고, 남은 흔적을 지우는 과정이 뒤따르기도 한다. 증발자 중에는 충동적으로 빈손으로 집을 나서는 이도 있지만, 상당수는 다른 이의 손을 빌려 자취를 감춘다.

누군가 증발하면 이들을 찾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실종신고가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한 경찰은 “마음먹고 숨어든 사람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귀띔했다.

증발하는 사람들, 증발자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증발 해결사’로 향한다. 증발을 돕는 야반도주 전문 업체와 신분세탁 업체부터 증발자를 뒤쫓는 탐정까지···. 증발자를 둘러싼 ‘증발 생태계’는 은밀하게 꿈틀대고 있다.
  •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
  • 보안 유지가 생명
  • 증발의 흔적을 찾아서
  • 탐벙의 등장과 한계

1. 이유를 묻지 말 것.
2. 제3자에게 행선지를 알리지 말 것.
3. 신속·은밀하게 움직일 것.

의뢰인의 증발을 돕는 이들에게 이 세 가지 규칙은 불문율이다. 달빛마저 사라진 어두운 밤, 최소한의 짐을 꾸려 움직일 때 구구절절한 사연이나 신상정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증발할 시간과 장소면 충분하다.

취재팀은 수년째 증발을 돕고 있는 업체 10곳을 접촉했다. 이들은 “질문은 금물. 의뢰인을 모시고 사라질 뿐”이라고 입을 모았다.

예전에는 야반도주만 전문으로 하는 업체들이 있었다. 특히 외환위기, 금융위기 등 나라 경제가 출렁이면 이런 업체들이 반짝 성업을 이뤘다. 최근에는 고객 요구사항에 따라 맞춤형으로 증발을 돕는다. 개인용달 사업자들이 ‘아침 댓바람 이사’, ‘남친 몰래 이사’ 같은 광고를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A이사업체 대표는 “처음에는 눈길을 끌려고 재미 삼아 이런 문구들을 넣었다. 평일 낮에 시간 내기 어려운 직장인들이나 혼자 사는 사람들을 타깃으로 했다”면서 “그런데 의외로 사라지기 원하는 분들의 문의가 한 달에 몇 건씩 오더라”고 말했다.

업체들에 따르면 최근 20~40대 젊은층의 의뢰가 늘고 있다. 증발 시간은 0시에서 새벽 6시에 집중돼 있다. 행선지는 전국 구석구석으로 스며든다. 이동 거리, 옮겨야 할 짐, 필요 인원에 따라 가격은 달라진다. 일반 이사 비용의 1.5~2배가 시세다. 이사업체인 ‘쉐어워크’ 대표는 “고객이 ‘무조건 빨리 와 달라’고 하는 경우는 대부분 흔적 없이 사라지려는 사람이다. 이럴 때는 우리도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조용히 움직이는 걸 최우선으로 한다”고 말했다. B용달업체 대표는 “의뢰인들이 눈에 띄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무조건 1t짜리 소형 트럭을 찾는다”면서 “여기에 못 싣는 짐들은 폐기 비용을 따로 주면서 ‘흔적 없이 없애 달라’고 한다”고 전했다.

관련 업체들은 여러 차례 증발을 처리하다 보면 어떤 이유로 사라지려 하는지 대략 짐작이 될 때도 있다고 말한다. 그래도 의뢰인이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사연을 묻지 않는 게 원칙이다. 모르는 편이 더 나을 때도 있다. 증발자의 짐을 챙기고 뒷정리까지 한 적이 있는 C심부름업체의 대표는 “빚 독촉에 못 이겨 도망치는 의뢰인이 있었다. 우리는 이런 배경이나 사연에는 아예 눈을 감고 일을 처리해야 안 다친다”고 했다.

보안 유지가 생명

‘도니용달’ 고모 대표(41)는 2년 전 이상한 전화를 받았다. 앳된 목소리의 여자가 떨면서 “내일 새벽 3시에 경기 평택시로 와줄 수 있냐”고 물었다. 큰 빌딩 이름만 달랑 알려주고 그 앞에서 보자고 했다. 용달업체 운영 6년 만에 이런 의뢰는 처음이었다.

고 씨는 약속대로 접선 장소로 갔다. 쌀쌀한 가을밤에 어울리지 않게 얇은 치마 차림의 여성이 어두운 구석에 서 있었다. 여성을 트럭에 태우고 집으로 이동해 조용히 짐을 챙겼다. 그 사이 여성은 집 밖에서 계속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목적지인 서울 영등포를 향해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여성이 처음으로 정적을 깼다.

“업소에서 돈을 제때 안 줘서 다른 언니들은 벌써 다 도망갔어요. 마침 오늘이 쉬는 날이라 오늘 아니면 전 죽어요. 남자친구가 조폭이라 잡혀도 죽어요.”

한 번 터진 넋두리는 새로운 거처에 짐을 다 풀 때까지 간간이 이어졌다. 어슴푸레 동이 트자 여성은 불현듯 정신이 든 듯 “혹시 누가 저 찾으면 인천으로 갔다고 해주세요. 인천이요”라며 문을 닫았다.

증발자마다 어김없이 “누가 물어도 내가 어디로 갔는지 알리지 말아 달라”는 당부는 꼭 따른다. 남겨진 가족, 애인, 친구 등이 사라진 이를 찾으러 수소문하다가 폐쇄회로(CC)TV에 찍힌 차량 번호 등을 추적해 용달업체나 이사업체로 연락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업체가 사라진 사람의 행선지를 알려야 할 의무는 없다. 증발 조력자들에게는 보안 유지가 생명이다.

관련 업체 사람들도 가족이나 지인을 애타게 찾는 이들을 외면하는 게 쉽지는 않다. 하지만 입을 열었다가 자칫 증발자가 다칠 수도 있다. 다마스 용달차를 모는 D 씨가 겪은 경우가 그렇다. 2013년 추운 겨울밤 20대 여성을 태우고 내달린 적이 있다. 점잖은 목사 부부의 딸인데, 알고 보니 어릴 때부터 부모의 손찌검에 시달렸던 것. 스무 살 중반이 되면서 부모에게 “독립하겠다”고 했다가 더 혹독한 폭력을 당하고 있었다. 부모가 모두 집을 비운 어느 날 재빨리 옷 몇 벌과 겨울 이불 한 채만 챙겨 증발을 택한 그 여성을 위해 D 씨는 끝까지 행선지를 함구하고 있다.

증발의 흔적을 찾아서

2019년 여름 민간 조사기업 ‘더서치’의 최환욱 대표(31)는 “어머니를 찾아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딸은 어린 시절 사라진 어머니를 찾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최 대표를 찾았다고 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엄마니까” 찾고 싶을 뿐이었다.

15년.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있었다. 아버지와 다툼이 심했던 어머니는 이혼하지 않은 채 사라져 가족관계증명서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추적할 단서는 많지 않았다. 한참 전 어머니가 전입신고를 했던 주소지가 전부였다.

최 대표가 주소지를 찾아가 보니 다른 이가 살고 있었다. 직원들과 탐문에 나섰다. 주소지 인근 슈퍼마켓, 세탁소, 식당 등을 온종일 훑으며 의뢰인 어머니의 사진과 이름을 들이밀었다. 꼬박 이틀 매달린 결과 드디어 사진 속 인물을 알아본 이가 나타났다. “근처 저 건물로 이사한 것 같다”는 말이 나왔다. 또 무작정 찾아갔다. 빈집이 아니라는 것 하나만 확실했다.

건물 앞에 차를 대고 최 대표와 직원은 하염없이 기다렸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화장실도 안 가고 몇 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사진 속 인물과 닮은 사람이 차 앞을 스쳐갔다. 재빨리 다가가 딸의 이름을 외쳤다. 얼마 뒤 모녀는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최 대표는 당시를 떠올리며 “저희 일이라고 특별한 게 있는 건 아니다. 실마리를 찾을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릴 뿐”이라며 “증발자의 이름, 사진, 옛 주소를 알면 그래도 괜찮은 조건”이라고 했다.

탐정의 등장과 한계

올해 2월 국회에서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 개정됨에 따라 8월 5일부터 ‘탐정’이라는 이름으로 영리 활동이 가능해졌다. 그간 ‘민간조사원’, ‘생활탐색사’, ‘흥신소’ 등의 이름으로 활동하던 이들은 ‘탐정’, ‘탐정사무소’라는 이름을 내걸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증발한 성인을 찾는 등 경찰력이 일일이 미치지 않는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감이 생기고 있다.

성인 실종자들을 찾는 ‘전국가출인찾기운동본부’ 대표이자 탐정으로 활동 중인 서영근 씨는 “보통 ‘미아’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찾지 못하는 아이보다 찾지 못하는 성인이 더 많다. 죽은 사람도 있겠지만 살아 있는 사람도 많다”면서 “증발자로 인해 가족이나 지인들이 받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라도 탐정의 활동 폭을 넓혀야 한다”고 했다. 하금석 대한민간조사협회장은 “범죄에 연루되었든 자발적으로 사라진 사람이든 여하간에 사라진 사람을 찾는 일은 분명히 늘고 있다”면서 “현재 탐정들은 불법적 수단을 쓰는 일부 업종과 달리 발로 뛰며 탐문을 통해 남겨진 사람들을 돕는다”고 했다.

물론 여전히 제약도 많다. 업계에서는 “‘탐정’이라는 용어 사용만 가능해졌을 뿐 현실적으로 달라지는 건 없다”는 자조적인 목소리도 나온다. 일반적으로 탐정의 업무로 여겨지는 민형사 사건의 증거 수집 활동, 잠적한 불법 행위자의 소재 파악 등은 여전히 제한된다. 최환욱 대표는 “권한이나 활동 범위가 사실상 달라진 게 없다. 공개된 자료를 토대로 증거를 수집하는 행위가 전부”라고 했다.

탐정업을 허용하면서 법으로 탐정의 자격과 권한을 정하지 않은 데에 따른 우려도 크다. 때문에 탐정업 관계자들은 ‘공인탐정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탐정업 관계자는 “탐정 업무 중 일어나는 불법 행위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필요하다. 공인탐정의 권한 등에 대한 법제화 없이는 진정한 탐정 업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정부는 민간 탐정 활동에 따른 폐해를 막기 위한 ‘공인탐정제도’ 도입을 추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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