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죄인이 됐다. 바이러스는 이겼지만 낙인에 지다

신문을 끊지 않았는데 어느 날부터 신문이 배달되지 않았다. 치킨을 주문하고 주소를 불러주니 갑자기 “닭이 떨어졌다”며 전화가 뚝 끊겼다.
바스락 인기척에도 두 사람은 재빨리 창밖을 내다봤다. 가게 앞으로 차 한 대만 지나가도 손끝, 발끝이 얼어붙었다.

불과 넉 달 전만 해도 이들은 사람 소리, 차 소리가 가장 반가웠다. 멀리서 사람 소리가 들리면 얼른 문을 열고 “어서오세요, 몇 분이세요?”라고 반겼다. 그런데 이제는 무섭기만 하다. 누가 갑자기 욕을 하고 손가락질을 하는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이건 모두 그날 이후 생긴 증상이다. 3월 꽃샘추위 탓인지 왠지 으슬으슬하던 그날.

3월 18일 김호섭 씨(67)는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 병원을 찾았다. 엑스레이에 검게 나와야 할 폐의 3분의 2가 하얗게 흐려져 있었다. ‘5년 전 앓았던 폐렴이 다시 생겼나….’ 조금 심란해졌다. 하지만 심란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전북대 음압병상으로 가셔야 합니다.” 의사의 말에 김 씨의 가슴은 쿵 내려앉았다.

한순간에 ‘전북 10번, 전주 3번’이 됐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경황이 없었다.

지역에서 이름 난 매운탕집 주인장으로 이미 꽤나 유명한 그였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공인’이 될 줄은 몰랐다. 신문에, 방송에, 인터넷에 그의 가게와 가족들의 이름, 신상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낙인 인생’의 시작이었다. “이 집이 코로나래” 전북 진안에서 17년, 전주 우아동에서 20년. 매운탕에 인생을 걸고 열심히 살았다. 60대 후반의 김 씨 부부가 젊은 날을 쏟아 부은 ‘죽도민물매운탕’.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이 이름이 졸지에 ‘코로나 식당’이 되고 말았다.

김 씨가 확진 판정을 받자마자 보도가 쏟아졌다. ‘하필 음식점에서’라는 제목과 함께 온라인에 가게 이름과 위치, 김 씨 일가의 신상과 동선이 낱낱이 노출됐다. 김 씨 기사에는 “죽어도 싸다”, “그냥 빨리 뒤져라”, “살아야 할 자격이 없다”, “사형시켜라” 같은 댓글이 수백 개씩 달렸다.

전주 코로나19 60대 확진자, 죽도민물매운탕 식당 운영

김 씨가 입원하자마자 식당은 문을 닫았다. 구청, 보건소, 경찰서 사람들이 번갈아 식당을 찾았다. 평생 ‘매운탕 동지’로 살아온 김 씨의 부인은 황망한 와중에도 자리를 지키며 성실히 역학조사에 임했다.

보건당국은 3월 5~18일 김 씨의 동선을 공개했다. 꾸준히 다니던 헬스장, 생필품을 사러 갔던 슈퍼마켓, 감기 기운 등으로 찾았던 병원들이 모두 공개됐다. 부인과 아들, 처제, 손자, 헬스장 직원 등 김 씨와 접촉한 16명은 자가격리됐다.

‘코로나는 생각도 못했는데. 매일 다니던 곳, 늘 만나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폐를 끼치다니….’ 김 씨는 몸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식당 앞을 지나는 사람들이 “이 집이 코로나래”라며 손가락질을 하고는 사라졌다. 포털 사이트들은 죽도민물매운탕의 연관 검색어로 ‘코로나 식당’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 "가끔 한번씩 가던곳인데 식겁하네요.
    그런데 어디서 걸렸을까요 여행갔나 대구로"
    mini**** | 2020.03.19. 23:50
  • "식당 종업원 중국인 많음" " bing**** | 2020.03.19. 11:05
  • "정말 인간 말종이네 어떻게 열까지 나고
    증상이 있는데 저리도 돌아다녔을까?"
    page**** | 2020.03.19. 16:23
  • "앞으로 고넘 식당 가지 마시길!" nine**** | 2020.03.19. 21:59
  • "혼자 죽기 싫어서 퍼뜨리는 님 정말 정말 누구세요???
    왜 왜 왜 왜 왜 정말 대단하시네...."
    gotn**** | 2020.03.19. 01:58
  • "저기 근처도 안가야지 무서워서 살겠나" ek11**** | 2020.03.19. 21:27
  • "이런 자는 공공의 적, 죽게 내버려둬야 한다" rm46*** | 2020.03.19. 14:36
  • 으휴... 죽어도 싼 사람들이 꼭 있다..
    머리에 뇌는 없고 똥이 들었지... 어찌 생각을 못하누
    jsjk**** | 2020.03.20. 09:24

“그날부터 구경거리가 된 거야
우린. 동물원 원숭이처럼….”

그래도 이때까지는, 몸만 회복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런 희망을 품고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섬이 된 ‘죽도’ 불행 중 다행으로 부인을 비롯한 김 씨의 접촉자들은 코로나19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들과 죽도민물매운탕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확진 소식이 언론에 알려진 이튿날부터 쉴 새 없이 가게 전화가 울려댔다. 하루 100통이 넘었다. 욕설과 막말이 쏟아졌다. 비난과 공격의 서막이었다.

행실을 어떻해 했길래

망해버려라

죽어라

대구에서 병균을 옮아왔다

당장 전주에서 떠나라

의심과 비난은 밑도 끝도 없었다. 김 씨 부인은 “너희 남편이 신천지 여자랑 어디서 널브러졌다 온 거 아니냐”는 막말도 받아내야 했다. 억울했지만 욕을 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죄송하다”, “신천지랑 아무 상관이 없다”며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어떤 이는 “대구에서 민물고기를 실어오다가 코로나가 감염된 거 아니냐?”고 몰아치기도 했다. 김 씨 부인은 “우리가 왜 대구까지 가서 물고기를 가져오겠어요. 늘 남편 고향인 진안에서 받아왔는데요. 그렇게 말해도 사람들이 믿어주질 않더라고요”라며 한숨을 쉬었다.

부부는 지쳐갔다. 밀려드는 전화를 더 이상 받을 힘이 없을 무렵, 전화가 서서히 줄었다. ‘전주시 추천 맛집’ 간판을 달고 20년 영업한 전통도 전화와 함께 사라졌다.

식사 때마다 문전성시를 이루던 식당에 그 누구도 찾지 않았다. 전주의 한 택시기사는 “이름만 들어도 다 알 만큼 유명했던 집”이라며 “주인이 감염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근처에 가자는 손님도 없어졌다”고 했다.

손님만 떠난 게 아니었다. 신문 배달원도 감염이 두려워서인지 죽도민물매운탕에만 신문을 넣지 않았다. 다른 식당 음식을 시켜먹으려 해도 거부당하기 일쑤였다. 몸이 불편할 때마다 방문했던 병원은 “굳이 올 필요 없다. (증세를 알려주면) 처방전을 약국에 보내놓을 테니 약국에서 약을 찾아가라”고 했다.

코로나 낙인이 찍혀버린 ‘죽도’민물매운탕은 섬이 돼버렸다.
왼쪽부터 김호섭 씨의 처남, 아들, 부인
헛된 희망
김 사장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이겨냈다. 입원 23일 만인 4월 9일 완치 판정을 받고 퇴원했다.

밀접 접촉자들 중 추가 감염자는 없었다. 보건당국의 역학조사 결과 김 씨는 신천지 신도도 아니었고, 대구 방문 기록도 없었다. 전주 시내 이동 중에도 도보나 개인 차량만 이용했다.

그러나 김 씨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기 전 사우나에 간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비난 수위는 더 높아졌다. 김 씨가 코로나에 걸린 줄 알면서 일부러 사우나에 갔다거나, 역학조사에서 동선을 숨겼다는 비난이 인터넷에 떠돌았다.

그러나 김 씨의 동선을 직접 조사한 경찰의 설명은 다르다. 문대봉 전주 덕진경찰서 수사과장은 “초기에 (김 씨의)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서 통화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이다 보니 늦게 파악된 것뿐”이라며 “일부러 진술을 하지 않거나 고의로 숨긴 게 절대 아니다”라고 했다.

보건당국은 김 씨의 감염 경로를 밝혀내지 못했다. 전주시 홈페이지상 김 씨의 감염원은 여전히 ‘확인 중’이다.

김 씨는 ‘어디서 옮았는지’는 모르지만 ‘어디로 옮기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비난과 저주는 아직 진행형이다.

온라인 세상에서 김 씨는 여전히 ‘혼자 죽기 싫어 코로나를 퍼뜨린 자’이자 ‘당장 죽어도 싼 자’이다. 죽도민물매운탕은 ‘대구에서 코로나를 실어온 식당’이자 ‘근처도 가지 말아야 할 곳’이다. 오프라인 세상에서도 별반 다를 바 없다.
낫지 않는 병
코로나19는 나았지만 새로운 병이 생겼다. 결벽증, 수면장애, 공황장애, 우울증까지….

김 씨 부부는 바이러스를 없애야 한다는 강박에 일주일에 한 통씩 소독제를 써댄다. 손이 하얗게 벗겨질 정도로 소독제를 문지르고 또 문지른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심장이 쿵쿵댄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한숨을 쉬는 버릇도 생겼다. 하루 종일 방 안을 빙빙 돌기만 한 적도 있다. 사회적 낙인은 밝고 활기차던 부부에게 우울감과 공황장애를 안겼다.

이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김 씨의 처남은 누나와 매형을 붙잡고 한탄을 한다. “형님, 우리 코로나 아니야. 우리 코로나 아니라고….”

코로나19에서 회복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거라는 김 씨 부부의 바람은 헛된 희망이었다. 제자리로 돌아온 건 몸뚱이뿐. 모든 게 나빠졌다.

국가트라우마센터(보건복지부 코로나19 통합심리지원단)상담 건수 첫 확진자 나온 1월 29일 ~ 8월 25일 누적 기준
확진자 및 가족(동거인 기준) 2만 102건
확진자 또는 가족 아니지만
자가격리자와 일반인
(생활치료센터 혹은 코로나19로 인한 우울증 불안감 느끼는 사람)
39만 1453건

불투명해진 꿈

죽도민물매운탕은 그날 이전과 이후, 완전히 다른 공간이다.

김 씨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던 3월 18일 이전. 40명 규모의 큰방, 10명씩 앉을 수 있는 작은방 5개, 홀에 있는 16개의 테이블은 오전 11시 무렵부터 손님들이 들어찼다. 예약 현황판은 늘 빼곡히 차 있었다. 손님들이 맛있게 비운 매운탕 냄비를 씻어내기 무섭게 새로운 매운탕을 담아 보글보글 끓여냈다. 월 매출은 2000만 원을 거뜬히 넘겼다.

그날 이후 6월까지 하루에 쓰는 매운탕 냄비는 기껏해야 한두 개. 한 달 매출은 200만 원이 되지 않는다. 가족 3명이 매달린 일터의 한 달 매출이 근로자 1명의 최저임금(올해 월 179만5310원) 수준이다.
김 씨가 완치 판정을 받은 지 107일이 흐른 7월 24일. 점심 식사가 한창일 시간이지만 식당 안 손님은 인근 주민센터에서 단체로 온 8명이 전부였다. 다행히 이들은 예약 시간에 맞춰 식당을 찾아줬다. 요새는 간혹 단체예약이 들어왔다가도 취소되는 일이 잦은데 고마운 일이다.

“단체로 예약했다가도 다시 전화를 하더라고. 일행 중 몇몇이 코로나 때문에 가기 싫다고 하나봐. ‘사장님, 다음에 갈게요. 죄송해요’라며 취소하는데 어쩔 수 있나 뭐.” (김 씨 부인)

김 씨는 “우리 사정을 아는 이들이 단체로 와주는 경우 이외에 일반 손님은 거의 없다.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데도…”라며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7월 상황은 그래도 나아진 편이다. 지난해 매출의 30% 수준까지 회복했다. 주방 정리를 마친 뒤 잠시 밖으로 나온 김 씨 부인은 “그나마 마음을 써서 일부러 가게를 도와주는 손님과 고향 사람들 덕분”이라며 “아직도 일반 손님들은 뭐…”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들 단체 손님이 떠난 이후로 점심 손님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아주 가끔 정적을 깨며 전화벨이 울렸다. 더는 욕설을 퍼붓는 전화는 아니다. 예약을 하려는 ‘귀한 손님’들의 전화다. 그런데도 부부 얼굴의 그늘은 가시지 않았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는 절박함과 불안감이 이들을 짓누르고 있다.

“혹시라도 식당이 한번 더 코로나19에 얽히면 어떡해요. 한 번은 어떻게 겨우겨우 지나갔더라도 두 번은… 두 번은 정말 끝이에요 끝.”
손님 없는 식당이란 괴괴하다. 김 씨는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을 맞이하려 가게 문 앞을 서성인다. 신을 이 없는 실내화를 이리 놓았다 저리 놓았다 줄을 맞춘다. 두를 이 없는 앞치마를 의자에 놓았다 옷걸이에 걸었다 손길을 놀린다. 며칠 째 손님이 한 번도 앉지 않은 테이블을 괜스레 한 번 더 닦아본다.

김 씨 부부는 당초 이곳에서 3년 정도 더 장사를 하려고 했다. 아들 뒷바라지 할 돈을 모으면 고향인 진안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미래는 불투명해졌다.

“직접 지은 집에 작은 식당을 열어서 조금씩 손님을 받으려 했는데…. 이젠 그게 될지 모르겠네.”

이젠, 놓아주세요

강영석 전라북도 보건의료과장은 “그 분(김 씨)이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이젠 코로나19로부터 그 분을 놓아드리고 회생하도록 도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사랑하는 도민 여러분, 마녀사냥은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힘들어도 따스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렵니다. 동선 공개로 아파하실 분들에게 우리 위대한 전북도민 여러분들의 따사로운 살핌을 바랍니다.
(2월 22일 강 과장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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