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어머니

코로나는 흔적만 남겼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확진된 뒤 4월 6일 홀로 숨진 채 발견된 김은숙(가명) 씨는 자녀들이 시신을 인계하지 않아 ‘무연고 코로나19 사망자’로 화장됐다.
경기 의왕시 봉안소 추모시설에 안치된 김 씨의 유골함을 취재기자가 응시하고 있다. 의왕=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어머니가 고통 속에서 눈을 감은 집, 마지막 흔적이 남은 곳

어머니가 외로움을 달래며 가꾸던 화단, 가족을 떠올렸을 장소

어머니가 365일 운영했던 호프집, 삶의 무게가 느껴진 곳

어머니가 매일 지나다녔던 길, 가족과 함께 걷지 못한 거리

어머니의 흔적을 정리하러 온 날, 무심하게 떨어졌던 빗방울

  • 그는 지금도 가끔 그날이 떠오른다.
  •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전화를 받은 날을.
  • 하지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
4월 6일. 서정수(가명·40) 씨에게 그날은 여느 때와 다름없던 날이었다.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오기 전까지는.

“여보세요, 서정수 선생님 맞으신가요?”

“네, 누구신가요.”

“경기 의왕경찰서입니다. 김은숙(가명) 선생님이 어머님 맞으시죠? 애석하게도 오늘 별세하셨는데,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

정수 씨에겐 ‘어머니’란 단어조차 생경했다. 평생 연락 한번 나눈 적 없던, 목소리 한번 들어본 적 없던, 그 어머니가 홀로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나는,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김은숙 씨가 살았던 경기 의왕시 다세대주택. 김 씨는 이곳으로 이사 온 지 1년도 안 돼 홀로 방 안에서 눈을 감았다. 의왕=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4월 6일 오전. 경기 의왕시에 있는 한 빌라에서 김은숙 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향년 67세. 가족도, 친구도 없는 집에서 홀로 맞이한 고독한 죽음.

김 씨가 비교적 일찍 발견된 건 이유가 있었다. 그는 전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검사를 받았다. 다음 날 그는 확진 판정을 받았고, 보건소는 그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하지만 김 씨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의왕시와 경찰이 확인한 결과, 김 씨에겐 가족이 있었다. 딸 2명과 아들 1명. 이들은 수십 년 전 헤어진 어머니와 연락 한번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남보다 더 멀기만 한 사이였다. 게다가, 둘째 딸은 행방조차 알 수 없었다.

4월 7일. 결국 첫째 딸과 아들은 어머니의 시신 인계를 거절했다. 의왕시와 보건소는 첫째 딸과 아들로부터 ‘사체 포기 각서’를 받은 뒤, 김 씨의 시신을 화장했다.

세상과 외롭게 작별을 한 김 씨에겐 2가지의 기록이 남았다.
‘의왕 252번 확진자.’ 그리고, ‘무연고 코로나19 사망자.’
길고 긴 코로나19.

지난해 1월 20일 국내에서 첫 확진자가 발생한 뒤 498일째.
올 5월 31일까지 국내에선 14만799명의 확진자가 나왔고,
1963명이 목숨을 잃었다.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난 이 가운데 누구 하나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있을까.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아들과 딸.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이웃.
소중하고 귀한 생명이 덧없이 쓰러졌다.

숨진 1963명 가운데 9명(4월 말 기준)에게는 세상이 다른 이름을 달아줬다.

‘무연고 코로나19 사망자.’
홀로 떠난 뒤 아무도 돌보지 않은 죽음.

김은숙 씨도 그랬다.
감염병
“몸이 많이 아파···. 일도 못 나가고 꼼짝을 못 하겠어.”

4월 3일 토요일 의왕시 다세대주택. 김 씨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지독한 허리 통증. 고열로 세상이 빙빙 돌았다. 벌써 며칠째인가. 식사는커녕 대소변을 가리기도 힘들었다.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하지만 홀로 사는 그를 도와줄 가족은 없었다. 하필 옆집 102호 아주머니마저 가족을 만난다며 집을 비웠다. 마지막 힘을 짜내 옆집 이웃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김 씨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주말이 지난 뒤 102호 아주머니와 또 다른 이웃은 김 씨를 부축해 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병원 문턱도 들어설 수 없었다. 규정상 고열 환자는 코로나19 검사부터 받아야 했다. 이들은 의왕보건소로 발길을 돌렸다.

3명 모두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자택 대기’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이고, 별일 없어야 하는데.”

6일 오전 8시 50분경. 102호 아주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보건소였다.

“선생님, 코로나19 검사 결과는 음성입니다. 그런데 확진자와 밀접 접촉이라 2주 동안 자가 격리를 하셔야 해요.”

“확진자요? 누가 코로나19에 걸렸나요.”

확진자는 함께 검사를 받은 김 씨였다.
김은숙 씨가 살았던 다세대주택 앞 골목길. 김 씨는 매일 이 길을 지나 자신이 운영하는 호프집으로 향했다. 의왕=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불안했다. 바로 찾아간 김 씨의 집엔 불이 훤히 켜져 있었다. 그런데 불러도 대답이 없다.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102호 아주머니는 다급히 119로 전화를 걸었다.

“옆집 할머니가 아무리 불러도 인기척이 없어요. ··· 얼른 좀 와주세요.”

긴급 출동한 구급대가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이미 김 씨는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전 9시 26분. 코로나19 확진자 김 씨에게 내려진 사망 판정. 코로나19 감염 사망자는 부검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사인과 사망시간은 모두 ‘불명’이었다. 아들과 큰딸(45)은 시신 인계를 거부했다.
현재 과거
1985년의 어느 날. 김 씨는 밤에 몰래 집을 나왔다. 잠들어 있는 삼남매를 내버려둔 채.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다. 술만 마시면 손찌검을 하는 남편. 임신부일 때도 남편의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나중엔 집에 남은 몇 푼 안 되는 돈까지 몰래 가져갔다.

‘이대로 있다간 죽는다.’

그는 살고 싶었다. 그리고 언젠가 돈을 모아 아이들을 만날 생각이었다.

악착같이 살았다. 한 푼 없이 시작한 서울생활. 식당과 슈퍼마켓 등에서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벌었다. 풍문으로 시누이인 아이들의 고모가 삼남매를 키운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 전화했더니 시누이는 단칼에 잘랐다.

“애들이 (자기들 버린) 엄마 안 만나고 싶대.”

아이들을 떠나온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겼던 김 씨는 그 말이 사실인 줄 알았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삼남매
2002년 의왕시. 가족을 떠나온 지 17년. 먹을 거 입을 거 아껴가며 살았던 김 씨는 드디어 꿈을 이뤘다.

‘내 가게.’

겨우 테이블 몇 개뿐인 호프집이었지만 나만의 일터를 꾸린 보람은 컸다. 김 씨는 열심히 일했다. 매일 새벽, 시장에서 직접 재료를 사와 음식을 만들었다. 손맛이 좋고 정성껏 대접한다는 소문이 났다. 조금씩 단골도 늘어났다. 주변에선 여러 가게들이 생기고 사라졌지만, 김 씨는 그 자리를 지켰다. 자연스레 동네 상인들은 김 씨를 ‘터줏대감’이라 불렀다.

터줏대감은 언제나 씩씩하게 장사를 했지만, 가끔씩 얼굴에 수심이 깊어졌다. 집에 놓고 온, 아이들을 이야기할 때였다.

“멀리 경상도에 살고 있다고 들었어요. 돈이라도 좀 부쳐주고 싶은데, 그걸 전달할 방법이 없네요.”

그래도 시누이가 잘 키워주고 있겠거니···. 김 씨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그리움을 삼켰다.
김은숙 씨가 운영한 호프집 내부에 냉장고와 보일러 등이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김 씨는 이곳에서 19년 가까이 호프집을 운영했다. 의왕=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아이고, 왜 이렇게 숨이 차지?”

2019년. 김 씨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상하게 발이 부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찼다. 심부전증에 고혈압까지. 약을 달고 살았다. 하지만 이듬해. 더 큰 난관이 닥쳤다.

코로나19.

몇 달간 가게 문을 열지 못했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데 월세는 쌓였다. 그게 마지막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
과거 현재
2021년 5월 1일. 빗줄기는 강한 바람을 타고 조금씩 굵어졌다. 바쁘게 돌아가는 차량 와이퍼. 서정수 씨와 부인은 경남 김해시에서 4시간 반을 달려 의왕에 도착했다. 작디작은 화단. 비를 머금은 초록 잎사귀들이 싱그럽게 미소를 지었다. 주민 할아버지는 “김 씨가 애지중지하며 키운 식물들이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를 받은 그날 이후, 정수 씨는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 그래도 어머니인데, 이대로 둬도 되는 걸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아내와 상의 끝에 의왕을 찾았다. 마지막 가시는 길. 유품이라도 정리해드리고 싶었다. 그곳에선 어머니의 사진도 나왔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어머니의 얼굴.
김은숙 씨가 집 앞 화단에서 가족 없이 홀로 지내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키운 식물. 김 씨가 세상을 떠난 뒤 이 화단은 이웃 주민이 관리해주고 있다. 의왕=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김 씨가 어디선가 잘 살고 있으리라 믿었던 삼남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삼남매가 아니었다. 정수 씨의 작은 누나는 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났다. 교통사고였다. 사망신고도 안 됐다. 아버지도 뒤를 따랐다. 알코올의존증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한 후 숨을 거뒀다.

고모가 어머니에게 전한 말은 거짓말이었다. 큰누나와 정수 씨는 친척들 손에 큰 적이 없었다. 그들은 보육원에 남겨졌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그곳에서 생활했다. 친척들로부터는 도움받은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자신들을 찾는다는 소식도 전해 듣지 못했다.
“김 씨는 둘째 딸 죽은 건 아예 몰랐어. 언제나 삼남매 보고
싶다고 했지. 근데 애들이 안 보고 싶어 해서 찾아갈 수 없다고.
그래도 고모랑 친척들이 애들 거둬서 잘 키워주고 있다고
믿었어. 김 씨는 마지막까지 그렇게 알고 갔어.”(이웃주민)
호프집 정리도 끝났다. 한참을 지켜보던 맞은편 슈퍼마켓 주인. 정수 씨 부부에게 커피 한잔을 타줬다.

“잠깐밖에 얘기를 못 나눴지만, 아들 부부가 참하고 착합디다. 평생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고···. 어머니를 원망하는 눈치는 아니었어요.”
자식이니까
아들 정수 씨는 언론과 직접 접촉하길 꺼렸다. 오랜 고민 끝에 부인이 대신 이야기를 전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남편이 힘들어했어요. 아무래도 저희는 다른 유족과는 다른 상황이었으니까요. 다른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그래도 어머님인데 마지막 가시는 길을 그렇게 보낸 게 마음이 좋지 않았죠. (유품을 정리한 건) 자식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거예요.”

“이번에 남편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었어요. 어머니도 자신들을 그리워했단 것을. 사실 어머니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어요. 그렇게 떠난 어머니가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 사실은 어머님도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연락을 못 했던 거였네요.”

‘무연고 코로나19 사망자’ 김은숙 씨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평생 가슴의 한이었던 자식들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아들과 딸에게 얼마나 그들이 그리웠는지 한마디 말도 못한 채.

혹시, 만약에라도···.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언젠가 만날 수 있었을까.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 돼버렸다. 코로나19는 그 작은 희망도 재로 남겨버렸다. 이미 떠나버린 고인. 의왕시 봉안소에 안치된 김은숙 씨의 유골은 말이 없다.

김은숙 씨 외 무연고 코로나19 사망자 8명의 사연을 담은 기사는 여기를 클릭하세요.

발간일 2021년 6월 14일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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