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커에서 걸그룹 에스파의 ‘넥스트 레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룻바닥에 앉아 떠들던 아이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내 들고 있던 형광색 큐브 장난감도, 자기 손바닥보다 큰 스마트폰도 잠시 책가방 안에 넣어둘 때다.
“파이브, 식스, 세븐, 에이트”
박수 소리가 네 번 울리자 아이들은 일제히 오른손을 옆으로 뻗었다 다시 몸쪽으로 가져왔다. 왼손으로도 같은 동작을 반복한 뒤에는 팔과 반대쪽 다리를 함께 뻗었다. 거울을 노려보며 절도 있게 손발을 움직이지만 지그재그 모양의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뒷모습은 ‘초딩’임을 숨기지 못한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K팝 아카데미인 SL스튜디오의 ‘기본 루틴’ 수업 모습이다. 가장 어린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가장 큰 아이는 6학년이다. 이미 웬만한 아이돌 춤을 꿰고 있는 아이들은 스피커에서 나오고 있는 최신곡의 안무를 거뜬히 출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수백 번은 해본 듯한 단순한 손, 발 뻗기 동작을 진지한 눈빛으로 반복했다.
이 수업에서는 모든 춤의 기본이 되는 손발 뻗기, 웨이브, 턴 동작을 배운다. 김용재 댄스 트레이너는 “아이들이야 당연히 방송 댄스를 더 추고 싶어 하지만 왜 기본 훈련을 해야 하는지 이해한 상태에서 온다”고 했다. 손끝, 발끝까지 똑 떨어지는 ‘칼군무’를 추려면 이런 기본 동작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모든 동작 연습을 마치면 플랭크(40초씩 3회), 버피(15회), 다리 스트레칭 같은 마무리 운동이 이어진다. 아직 근력운동을 하기엔 너무 어린 저학년(2~4학년)은 잠시 빠져야 하는 시간이다. 연습실 뒤편 계단식 의자 첫 칸에 나란히 앉은 아이들은 바닥에 닿지 않는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언니, 오빠들을 지켜봤다.
월말 평가 날에는 학부모들이 모두 초대된 단체 카톡방에 수업 때 배운 팔·다리선 잡기, 웨이브, 턴 동작에 대한 학생별 평가가 올라온다.
‘안 쓰는 손 정리, 손에 힘은 좋아졌으나 느리며 더 뒤로 뻗어야 함, 다리에 힘주기’ ‘올라올 때 몸이 앞으로 기울여지지 않기’ ‘손을 너무 몸에 붙이고 있음’….
주말이면 SL스튜디오 주차장을 꽉 채운 자동차 행렬이 건물 앞 길가까지 이어진다. 자녀들의 ‘아카데미 셔틀’에 나선 부모들의 차다. SL스튜디오에서 직선거리로 4km 떨어진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 대치동 학원가와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다른 게 있다면 이들은 국 영 수가 아닌 댄스 보컬을 배우고, ‘SKY’가 아닌 ‘SJHY(SM, JYP, HYBE, YG)’ 같은 유명 엔터테인먼트 기업을 꿈꾸는 것일 뿐이다.
아직 혼자 버스와 지하철을 타는 게 익숙하지 않은 초등학교 6학년 박지민 군도 그런 아이 중 하나다. 종일 봄비가 내리던 5월 16일, 지민이는 엄마와 은평구의 집을 나섰다. 재작년 11월부터 평일, 주말 가릴 것 없이 SL스튜디오에 연습을 하러 오고 있다.
건물에 도착한 지민이는 2층 로비로 올라가 연습실 예약표에 ‘지민’ 두 글자를 적었다. 연습실 공간이 한정돼 있어 학생들은 매시 50분마다 표에 이름을 적어 연습실을 예약한다. 주말에는 수업이 몰려 있고 지방에서 오는 학생들도 있어서 매시 50분이 가까워지면 예약표에 이름을 적으려는 아이들이 줄지어 선다. 뒤쪽 소파에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엄마들로 빈자리가 없다.
로비 벽면에는 ‘명예의 전당’이 있다. 이 아카데미를 다니다 캐스팅된 학생들의 이름과 이들이 합격한 기획사가 적힌 명패가 줄지어 걸린 곳이다. 입시학원들이 붙여놓는 대학 진학 성적과 비슷한 모습이다.
소녀시대 태연부터 엑소 카이, 마마무 문별 등 SL스튜디오 이솔림 원장의 손을 거쳤던 스타 제자들의 사진과 친필 사인 장식도 함께 붙어 있다. 이곳을 처음 찾는 어른들은 모두 신기한 듯 자세히 살펴보는 것들이다. 하지만 정작 이들처럼 인기 아이돌이 되길 꿈꾸는 아이들은 이곳에 별 눈길을 주지 않는다. 소녀시대 ‘Gee’(2009년) ‘소원을 말해봐’(2010년), 엑소의 ‘으르렁’(2013년) 같은 히트송이 한창 유행하던 때 태어났던 아카데미 원생들에게는 생소한 스타들이다.
일요일인 이날은 수업 없이 혼자 연습하는 날이다. 지민이는 기본기 수업에서 배운 손, 발 뻗기 동작을 한참 반복한 뒤 요즘 배우고 있는 샤이니의 ‘돈콜미(Don't call me)’ 안무를 복습했다. 오후 2시 50분부터는 보컬 연습실로 자리를 옮겼다. 2시간 동안 두 곡만 집중적으로 수십 번 반복해 불렀다. 2년 가까이 이 생활을 지켜보는 엄마 윤소연 씨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재롱잔치할 거 아니고 완벽하게 하려고 하는 거니까 하나 완성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죠.”
오후 4시 50분, 지민이는 다시 댄스 연습실을 예약해 오디션에서 출 춤을 연습했다. 스피커를 울리는 음악 소리에 연습실 한쪽에 벗어둔 스마트 워치의 진동은 묻혔다. 휴대전화가 없는 지민이가 통화용으로 들고 다니는 스마트 워치에는 ‘박하사탕’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박하사탕은 아랫집에 사는 친구의 별명이다. 조금 전에도 같이 놀자고 전화를 했던 친구다. 지민이는 “학원이라 안 된다”고 전화를 끊었다. 친구는 “학원인데 어떻게 전화를 받냐, 뻥치지 말라”며 연신 전화를 걸어왔다.
지민이는 최근 생애 첫 오디션을 봤다. 지민이 같은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보는 오디션에서 기획사 직원들은 당장의 실력보다 가능성에 초점을 둔다. 당장은 그저 어린 꼬마일 뿐이라 커서 어떤 모습이 될지를 예측해야 하는 것도 일이다. 직원들은 오디션에서 가족 키를 물어보기도 하고 이마까지 모두 보이는 얼굴 사진을 찍어가기도 한다.
18년가량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스타를 발굴해온 이 원장은 오디션을 보는 학생들의 나이가 부쩍 어려진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연예기획사들이 예전엔 초등학생 오디션 보는 것을 꺼려서 ‘3개월 후에 다시 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관리를 했어요. 연습생이 되면 SNS나 학교생활도 관리를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큰 다음 중 2, 3학년 때부터 보내달라고 했는데 요즘에는 초등학교 5, 6학년부터 뽑아가기도 합니다. 기획사에 따라서는 아예 ‘16세 이하만 보겠습니다’라고 하기도 해서 좀 더 빨리 준비를 시작하죠.”
준비생들의 국적도 다양해졌다. 대만, 일본, 중국, 태국 등에서 한국 기획사의 평가를 받아 보기 위해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린다. 이 대표는 “우리가 이제 방탄보유국이라고 하잖아요. 해외에서 아이돌이 되려면 ‘한국에 가서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요”라고 덧붙였다.
아카데미에서도 기획사처럼 월말평가를 치르며 오디션을 준비한다. 데뷔라는 꿈을 꿔보기라도 하려면 일단 기획사의 연습생이라는 꿈부터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연습생이 되는 것조차 꿈이라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문턱은 높다.
참가자가 많이 몰리는 대형 기획사 1차 오디션에서는 각자에게 할당된 시간이 촉박해 춤, 노래 중 하나만 보여줘야 할 때도 있다. 90초 남짓한 시간에 스타가 될 자질을 보여줘야 하는 셈이다. 그마저 기획사가 구상하고 있는 그룹의 ‘콘셉트’에 어울리지 않으면 아쉽지만 탈락이다.
물론 궁극의 성공을 이루는 길은 좁다. 힘들게 데뷔를 하더라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일이 더 ‘현실적’인 세계다. 그럼에도 여전히 수많은 아이들이 ‘비현실적’인 세계를 향해 몸을 던진다.
K팝 아이돌의 시작으로 꼽히는 ‘H.O.T.’ 출신으로 K팝 아카데미(스테이지 631) 공동대표를 맡고 있기도 한 토니안은 이런 아이들에게 특강을 할 기회가 있을 때면 현실을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고 한다.
“현실을 얘기해 줘야 하는데 경험해보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렵잖아요. 본인들이 생각하는 목표와 이상으로 꿈이 생긴 건데 내가 괜히 포기하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꿈을 꿔서 이뤄냈을 때 얻는 보상에는 그만큼의 고통이 따른다. 이건 저울질했을 때 정확히 보상과 고통이 각각 50%라고 말을 해요. 아이들도 월말평가나 발표가 있으면 어쨌든 압박감에 시달리는 경험을 이미 하고 있잖아요. 그런 게 늘 공존하기 때문에 이런 걸 이겨낼 수 있고 이 고통조차도 행복하다면, 이 길이 맞는 것 같다고 얘기를 하죠.”
토니안은 SM 오디션을 앞둔 초등학생 때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도전하겠다”고 했다. 도전하다 보면 한계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부딪쳐서 뚫는 것과 다른 길을 찾는 것 모두 각자의 몫이고, 어쩌면 그런 치열한 경쟁 속에 삶을 빨리 배우는 곳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도전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이래서 우리나라가 톱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사실 우리나라가 아시아 사람이, 춤과 노래로 세계를 제패할 거란 생각은 누구도 못 했을 거예요. ‘BTS 이후에 우리나라 가요계가 어떻게 갈 것 같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이 아이들을 보면 알죠. 의도된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정확하게 잘 정리가 돼 있구나…. 앞으로도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이런 한류는 지속될 것 같아요.”
2009년생 지민이는 H.O.T.와 토니안이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빌보드 1위 가수(BTS)를 보고 자란 지민이는 왜 아이돌을 꿈꾸는지 물으면 “세계 최고가 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엄마 윤 씨는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 아이의 상처가 고민되긴 하겠지만 아직은 괜찮다고 했다.
“고생해서 잘되면 좋겠지만 살다 보면 모든 곳에서 똑같이 노력하고 고생 다 해도 안 되는 사람이 훨씬 많잖아요. 너무 ‘이게 전부야, 이거 아니면 안 돼’보다는 좀 유연하게 ‘지금 이게 좋아서 하지만 이게 꼭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배운 걸 바탕으로 다른 것을 할 수도 있고 열심히 노력한 경험 자체도 소중한 것일 수 있어’ 이런 생각을 어느 정도 가지고 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딱 그 나이 때만 경험해볼 수 있는 게 있으니까요.”
지민이 누나는 지민이보다 먼저 아이돌을 준비하다 고등학교에 가면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 직접 부딪쳐 보니 데뷔는 어렵겠다며 스스로 결정 내렸다. 지민이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모른다.
지민이는 매일의 연습을 시 쓰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미래에 해야 할지도 모를 작사 연습을 겸해서 하는 일이다. 이날도 지민이는 연습을 끝내고 땀이 식기도 전에 연필을 들었다. 7행의 시에는 이날 기자의 셔터 세례를 받았던 자신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