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오전 4시 25분. 경남 진주시 가좌주공아파트 303동. 조현병을 앓던 이 아파트 406호 주민 안인득(45)은 이날 자신의 집에 불을 질러 집 전체에 번지게 했다. ‘조현’(調絃)은 현악기의 음율을 고른다는 뜻으로 정신의 조율에 있어 어려움 및 병이 있다는 의미로 붙여졌다. 망상, 환각 등의 증상을 보인다.
안인득은 미리 준비한 흉기를 양손에 쥐고 비상계단에서 대기하다 대피하는 주민들에게 휘둘렀다. 화재경보음에 잠에서 깨 비몽사몽으로 계단을 내려가던 주민들은 무방비 상태에서 얼굴, 목, 가슴 등에 상처를 입었다.
4시 32분, “누군가 흉기로 사람을 찌른다. 사람들이 대피하고 있다”는 최초 112 신고가 접수됐다. 3분 뒤인 4시 35분 경찰 5명이 현장에 도착해 10분간 대치 끝에 안인득을 검거했다. 5명이 숨지고 17명이 다친 뒤였다.
현관문을 열자 뿌연 연기가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어렴풋이 들리는 듯 했다.
복도를 지나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방화문을 열자 경비원이 있었다. 그는 피가 흐르는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수건 달라”고 외쳤다. 경비원 뒤로 보이는 복도 계단이 피로 가득했다.
1층으로 내려온 그의 눈에 엄마와 지윤이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눕혀져 있었다. 엄마도 손녀 지윤이를 지키려다 부상을 입었다. 2층 계단에 쓰러져 있던 두 사람을 민수 씨가 1층으로 옮긴 뒤였다.
“우리 조카는 숨을 쉬고 있었어요. 근데 구조대원들이 지혈을 안 해. 지혈을 안 하니 피가 펑펑 나는 거야. 목에서도 나고 팔에도 나고. 내가 ‘지혈 안 하고 뭐 하냐’고 하니까 엄마 지혈을 (소방대원이) 저보고 도와 달래. 그래서 (엄마) 목을 받쳐갖고 지혈을 하는데 지혈이 안돼. 다리며 이마며 피가 흥건해. 엄마 눈을 봤는데 이미….”
김 씨는 세은 씨가 순간순간 기억을 잃는 증상을 가장 걱정한다. 주치의는 PTSD로 인한 해리성 기억장애라고 진단했다. 처음은 건망증 수준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행을 갔던 것도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졌다.
지난해 8월에는 비 오는 날 한밤중에 두 시간동안 비를 맞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세은 씨는 그날을 기억하지 못 한다. 자정 무렵 오빠 네서 밥을 먹고 대리를 불러 집에 간다던 세은 씨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세은 씨 지인에게 연락을 돌리고 아파트 주변을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녔다. 새벽 두 시가 다 된 시간에야 집 근처에서 비를 맞으며 멍한 눈으로 걷는 세은 씨를 발견했다.
“세은아!”라고 불렀지만 세은 씨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김 씨 부축을 받아 집에 돌아온 세은 씨는 그날 목 놓아 울었다.
10분 사이 엄마와 조카가 목숨을 잃었다. 물웅덩이만 봐도 ‘그 날’이 떠오른다.
하루에 먹어야 하는 약이 또 늘었다. 금세은 씨(43)는 매일 10가지의 신경정신과 약 22알을 복용하고 있다. 추가된 약은 항우울제 0.5알과, 불안, 긴장, 경련 증상을 완화하는 약 3알. 이제 세은 씨는 하루에 알약 26개를 삼켜야 한다.
지난해 12월 30일 경남 진주시 경상국립대학교병원 신경정신과 진료실에서 주치의 김봉조 교수와 마주 앉은 세은 씨는 약을 늘리자는 김 교수의 말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2019년 11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와 우울증 진단을 받은 그가 하루에 먹었던 알약은 20~30개 사이. 2년 2개월 동안 알약 2만 개가 그의 몸 안에 고스란히 쌓였다.
베개에 머리만 대도 목 뒤까지 저릿해지는 편두통에 급격한 시력 저하까지 겹치면서 세은 씨는 며칠 전 같은 병원에서 뇌 자기공명영상(MRI)을 찍었다. “뇌에 문제는 없다”는 의사의 말에 안도감이 든 것도 잠시. 2년 넘게 약을 먹었지만 ‘그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이내 그를 덮쳤다. 약은 순서를 바꿔가며 찾아오는 전신 떨림, 두통, 호흡곤란, 불면증을 잠시 멎게 하는 임시방편일 뿐이다.
“어떻게 이렇게 하루 종일 머리가 아플 수 있어요? 이제 내 몸한테도 화가 나.”
“부작용 문제로 항우울제를 다 바꿨는데 2개월 넘게 기대하는 효과가 안 나와서…. 최근에 나온 약으로 바꿔 봅시다.”
“불면증 때문에 신경질적으로 변해서 약을 한꺼번에 다 먹었어요.”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괴로운 게 해결이 안 되니 짜증 안 나는 게 이상하지. 근데 앞으로 그렇게 약 한꺼번에 먹으면 절대 안 돼요.”
세은 씨는 오늘도 속 시원한 해결책을 듣지 못했다. 진료실을 나온 그는 병원 1층 약국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검정색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쓴 그는 약사로부터 A4 용지 네 장에 달하는 복약지도서와, 약 봉투가 가득 담긴 검정색 비닐봉지를 받아 들었다. “엄청 심각한 병 걸린 사람 같죠? 이게 2주치야, 2주치. 2주 뒤에 와서 이만큼 또 받아야 돼.”
주치의도 그런 세은 씨가 안쓰럽다. 김 교수는 “시기에 따라 환자를 심하게 괴롭히는 증상이 달라질 뿐 처음 진료 때와 비교해 나아진 점은 없다”며 답답해했다. “환자가 겪은 외상이 워낙 크다보니 장기간 치료에도 반응하지 않고, 다른 PTSD 환자에 비해 증상도 다양하고 깊게 나타납니다. 예전엔 잠을 못 자는 증상이 심했고 최근에는 두통, 시야 가림 증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요. 약을 바꾸며 다양한 시도는 하고 있지만 환자나 의사가 기대하는 효과에는 아주 못 미치는 상황입니다.”
Chapter 1

10분 만에 달라진 삶

2019년 4월 17일 이전의 세은 씨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일 중독’이었다. 치위생학과를 나와 스물세 살 때부터 시작한 치위생사 일이 잘 맞았다. 환자들과 대화하는 것도 즐거웠다. 일을 시작한지 3년 만에 치과 원장은 그에게 환자 상담도 맡겼다.
“사람 만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부끄러움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게 180도 변했어. 지금은 사람을 보자마자 꺼리기부터 하니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싫고 눈도 잘 못 마주치겠고. 예전의 내 모습이 그리워요. 지금은 내 자신이 바보 같아.”
‘엄마는 내 삶의 목표’라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로 끔찍한 효녀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3남매를 위해 집안일만 하며 살았던 엄마가 나이 들어서는 손에 물 묻히지 않고 편히 사는 게 세은 씨의 소원이었다. 엄마를 위해 세은 씨는 스물세 살부터 마흔 살까지 17년을 한 순간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아버지가 암 투병을 하며 졌던 집안 빚도 다 갚아가고 있었다. “가족 위해서 고생만 했던 우리 엄마 이제 친구들하고 놀러 다니고 해외여행도 가고 좋은 옷 입고 ‘가오’도 좀 잡길 바랐지. 우리는 영세민이잖아. 빚 갚으면서, 그 와중에 되는대로 돈 모으면서 열심히 살았어. ‘엄마, 이제 (통장) 플러스 된다. 조매만 기다려라. 한두 달 안 남았다’ 했는데….” 자칭 ‘일벌레’이자 효녀였던 세은 씨는 2019년 4월 17일, 180도 다른 사람이 됐다.
숨진 5명 중 2명은 세은 씨의 가족이었다. 그는 불과 10분 사이 ‘삶의 목표’였던 어머니 김모 씨(당시 65세)와, 딸처럼 예뻐했던 조카 금지윤 양(가명·당시 12세)을 잃었다. 세은 씨는 진주 방화·살인사건의 생존자이자 유가족이다.
Chapter 2

웅덩이에 빠진 날

딸을 피지로 유학 보낸 세은 씨는 엄마와 함께 아파트 303동 304호에 살고 있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날이었다. 엄마와 맥주 한 잔을 하고 17일 새벽 3시쯤 잠에 든 세은 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의 소란에 눈을 떴다.
이내 “살려주세요!”라는 올케 차모 씨(44)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세은 씨 오빠 금민수 씨(가명·47)네 부부와 딸 지윤 양도 이 아파트 403호에 살았다. 놀란 엄마는 복도로 뛰쳐나갔다. 5분이 지나도 엄마가 돌아오지 않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세은 씨는 잠옷에 슬리퍼 차림으로 현관으로 나갔다.
‘뭔가 사달이 났구나.’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가 화장실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수건을 여러 장 챙겼다.
다시 현관문을 열자 바로 앞에 올케 차 씨가 피를 흘리며 서 있었다. 아비규환 속 차 씨의 울부짖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윤이랑 어머니 죽는다! 신고해야 된다!” 차 씨도 안인득에게서 딸을 보호하다 옆구리를 흉기로 찔린 상태였다. 세은 씨는 떨리는 손으로 112를 눌렀다.
“지금 아파트가 피바다에요. 조카랑 엄마도 칼에 찔린 거 같아요. 빨리 와주세요!”
신고를 마치고 비상계단을 정신없이 내려갔다.
3층과 2층 사이엔 507호 주민 조모 씨가 피를 흘린 채 누워있었다. 조 씨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는 3층을 지나 2층 계단으로까지 뚝뚝 떨어졌다. 그와 눈이 마주친 세은 씨는 몸에 수건을 덮어줬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몸을 전혀 움직이질 못했지. 그 상태로 나랑 눈이 마주친 거야.”
세은 씨는 지금도 자신의 손 안에서 차갑게 식어 가던 엄마의 체온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Chapter 3

빗물은 핏물이 됐다

304호에 살았던 세은 씨와 엄마, 403호에 살았던 오빠 민수 씨네 가족은 1주일에 두 세 번은 함께 밥을 먹었다. 비 오는 날은 틀림없이 모였다. 땡초 넣은 ‘엄마표’ 된장찌개와 감자전, 삼겹살, 두루치기는 단골 메뉴였다.
“비 오는 날 제가 ‘언니(올케), 비와요. 땡초전 묵으까?’라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 얼마 안 있어 새언니한테 전화가 와요. “땡초 사오라.” 그럼 퇴근길에 슈퍼 들러서 밀가루랑 땡초랑 맥주 사서 가요. 비 오는 날을 참 좋아했는데…”
가족들 맥주파티 하던 비 오는 날은 이제 세은 씨에게 공포가 됐다. 비 오는 날 물이 고인 웅덩이만 봐도 그날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파트 복도에 창문이 없으니 비가 오면 다 들쳐요. 이사 오고 얼마 뒤 비가 많이 내린 날이었어요. 나가려고 문을 열었는데 문 앞에 물이 가득한 거야. 그걸 보는 순간 그날 복도에 고여 있던 피 웅덩이가 바로 떠올랐어요.”
피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그는 20년 간 했던 치위생사 일도 그만 둬야 했다. 환자들을 치료할 때 나는 피 냄새를 견딜 수 없었다. “피 냄새를 맡으면 우리 엄마 응급처치 하면서 피가 펑펑 나던 그 모습이 당장 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해.”
사건 직전이었던 2019년 초 한 모임에서 세은 씨와 알게 된 동갑내기 친구 김진석 씨(가명)는 사건 직후부터 그를 곁에서 지켰다. 호흡곤란, 전신 떨림, 해리성 기억장애, 불면증, 극심한 두통을 달고 사는 세은 씨를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불치병인 것 같아요. 100미터만 걸어도 숨 차하고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듯 놀라요. 식당 갔다 공황발작이 오기도 하고…. 당당하고 밝은 사람이었는데 모든 게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진 거죠.”
“증거 남기듯 사진을 찍는 게 습관이 됐어요. 어디 갔었는지도 기억 못 할 때가 있으니까 사진 보여주며 ‘우리 여기 갔었잖아’ 하려고. 둘 다 사진 찍는 것 정말 싫어하는데 계속 연습을 해요.” (김 씨)
Chapter 4

바꾼 이름, 바뀌지 않는 삶

세은 씨의 오빠 민수 씨와 그의 아내, 첫째 딸은 2019년 말 이름을 바꿨다. ‘이름이 잘못 돼서 온 가족에게 이런 비극이 닥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개명을 택했다. 늘 아빠 옆에서 잠을 자던 둘째 딸 지윤이, 술 마신 다음날 해장국 끓여놨다고 전화하던 어머니가 없다는 현실을 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름은 바뀌었지만 민수 씨의 삶은 여전히 4월 17일에 멈춰 있다. 안인득은 그날 자신의 집에 불을 질렀다. 같은 층에 살았던 민수 씨네 집 현관으로 이내 연기가 슬금슬금 넘어왔다. 민수 씨는 아내와 딸 지윤이를 깨워 먼저 내려가라고 했다. 수영선수인 첫째 딸은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해 집에 없었다. 가족들을 내려 보낸 그는 옆집 문을 두드리며 사람들에게 대피하라고 알렸다. 다른 사람들 뒤를 따라 마지막에 내려왔다. 그리고 어머니와 딸이 피를 흘리며 2층 계단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불이 나서 가족들을 내려 보냈는데 애하고 할매(어머니)가 누워 있어. 같이 내려갔으면 내가 죽었어도 아는 살렸을 거 아이가. 내가 왜 연기 빼고 창문 열고, 불났다고 문 두드리고…. 그게 제일 큰 실수라. 내가 미친놈이지.”
언니 금모 양(19)은 사건 1년이 지나고서야 가족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차 씨가 금 양을 학교에 데려다 주려던 일요일이었다. 방에서 짐을 챙기는 금 양의 눈이 벌겠다. “울었나?” 묻는 엄마의 질문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차 안에서도 묵묵부답이던 금 양은 기숙사 앞에서 “도대체 왜, 뭐 땜에 그카노?”라는 엄마의 질문에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동생이 너무 보고 싶다, 엄마. 운동장 뛸 때도 생각나고, 수영할 때도 생각나고, 밥 먹을 때도 생각난다. 그래서 미치겠다. 너무 힘들고 너무 보고 싶다. 미치겠다, 엄마.”
Chapter 5

원망할 수 없는 이유

민수 씨는 안인득의 형과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사이였다. 진주는 동네가 좁아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알았다. 민수 씨는 빵을 사다 주기도 하며 친구 동생을 챙겼다. 안인득 역시 처음에는 평범한 이웃 아저씨였다.
“가(안인득)가 애들 먹으라고 과자를 보따리로 사 주고 한 놈이라. 그냥 낯을 좀 많이 가리는 줄 알았어. 내가 ‘밥 묵었나’ 하면 ‘예’ 하며 지냈어. 근데 조현병이 심해지니 (지윤이를) 못 알아 본 기라.”
동생의 상태가 심각해지자 안인득의 형은 민수 씨에게 ‘고함지르는 소리 안 들리드나?’ ‘시끄러운 일은 없었나?’라며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술자리에선 “동생이 아픈데 약을 안 먹는다”며 걱정을 털어놓은 적도 있다. 사건이 발생하기 얼마 전엔 동생이 집에 있으면 연락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내가 가면 문도 안 열어준다. 집에 있는지 확인해보고, 있으면 전화 좀 주라.”
형은 걱정을 하면서도 동생이 조현병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민수 씨는 “알겠다”고 하고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당시 형 안 씨는 경찰과 검찰, 대한법률구조공단, 가호동 행정복지센터를 돌며 동생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조현병 환자였던 안인득, 그런 동생을 입원시키기 위해 사방팔방 뛰었던 안인득의 형이자 자신의 친구. 민수 씨는 딸과 엄마를 잃고도 누구 하나 속 시원히 원망할 수 없었다. 분노와 설움은 스스로를 향했다. 하루에 소주를 6병 씩 비우는 날이 허다했다. 사건 직후 1년은 술과 정신과 약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매일을 보냈다.
“조현병 환자가 왜 밉노? 그 사람들, 그냥 정신이 아픈 사람이다. 그렇게 될 때까지 방치돼 있었던 게 잘못이지. 약만 먹으면 괜찮았을 사람이 범죄자가 되고, 그 사람 가족까지 죄인이 되는 거고. 그걸 왜 못 막느냐는 거지. 안인득도 피해자다. 안인득 형도 피해자고.”
Chapter 6

눈물의 웅덩이는 마르지 않는다

물웅덩이만 봐도 그 날이 떠오르지만 세은 씨는 매년 추석, 설날마다 사건이 발생한 가좌주공아파트 3단지를 찾는다. 엄마의 숨이 멎은 곳이지만 엄마가 마지막으로 숨을 쉰 곳이기도 해서다. “추석, 설날 때마다 와요. 엄마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곳이니까…”
지난해 11월 11일 아파트를 찾은 금 씨는 아파트 정문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사건이 발생했던 303동을 향했지만 그 앞까지 가진 못했다. “저 안에까지는 못 들어가요. 나 여기선 모자도 절대 안 벗어요.”
시야를 차단하는 검정색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 쓰고 검정색 패딩 조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세은 씨는 303동과 한참 떨어진 309동 앞 벤치로 겨우 걸음을 옮겼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한동안 303동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고개를 푹 숙인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그는 한참 동안 화면을 쳐다봤다. ‘그리움’이란 제목의 사진첩 폴더에 저장된 엄마의 생전 사진이었다.
“우리 엄마 예쁘죠? 이렇게나 사진이 많은데 그날 아파트 입구에 쓰러져 있던 사진은 없어. 나라도 찍어 놓을 걸… 엄마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게 사진이라도 찍을 걸…”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 피지로 유학을 간 딸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머리 많이 길었네. 이제 진짜 숙녀 같다, 숙녀. 다 컸네.” 세은 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깨를 훌쩍 넘긴 머리를 매만지는 딸의 모습이 세은 씨는 낯설면서도 대견하다. 어느덧 13살이 된 딸을 한국으로 데려오고 싶지만 현재 건강 상태로는 딸을 제대로 돌볼 수 있을지 걱정이다. 세은 씨의 소원은 소박하다. 딸과 함께 살면서 좋아했던 치위생사 일을 다시 하게 되는 것이다.
“애가 성인이 될 때까지라도 몸이 버텨줬으면 좋겠어. 지금 몸 상태로는 운전도 제대로 못 하니까.”
올해 2월 설 세은 씨는 아파트를 가지 않았다. 트라우마를 남긴 장소에 가면 병세가 악화될 수도 있다는 주치의의 말 때문이었다. 대신 엄마와 조카의 유골함이 모셔져 있는 진주 응석사를 세 번이나 찾았다. 1000일이 지나도록 눈물의 웅덩이는 마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세은 씨에게는 키워야 할 딸이 있고, 서로 의지하고 보듬어야 할 가족이 있다. 오늘도 세은 씨는 그날의 웅덩이에서 빠져나오려 애쓰고 있다.

민수 씨와 세은 씨는 사건 발생 2년 7개월 만에 국가에 책임을 묻기로 했다. 이들의 소송을 대리하는 법률사무소 법과치유는 지난해 11월 8월 대한민국을 피고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장을 행정법원에 제출했다. 원고는 민수 씨 남매 세 명, 민수 씨의 아내 차 씨 등 총 4명이다. 소송의 요지는 경찰이 법에 명시된 매뉴얼을 따르지 않아 범죄가 발생했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소송을 하자는 제의가 처음 온 것은 2020년 봄이었다. 대한신경정신학회는 조현병 환자가 강력범죄를 저지르는 사건이 계속 발생하면서 관련 법 개정에 나선 상태였다. 학회는 이들에게 국가 대상 손해배상 소송에 나서 달라고 설득했다. 정신질환자를 국가가 책임지고 관리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두 사람은 1년을 꼬박 고민했다. 변호사에게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당시를 떠올려야 한다고 생각하자 두려움이 앞섰다. ‘돈 때문에 소송 하느냐’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서웠다. 하지만 금 씨 남매는 마음을 다잡았다. 가족의 죽음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 괜찮아져서 소송을 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민수 씨는 말했다.

“괜찮아져서가 아니라 괜찮아지려고 소송을 하는 기다.
이렇게라도 해야 억울함이 풀릴 것 같으니까.”

안인득이 아닌 국가에 책임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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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set 6

금 씨 남매가 소송을 결심한 건 안인득을 경찰이 제대로 관리만 했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돌았기 때문이다.

안인득이 사건을 저지르기 전 수개월 동안 주민들은 안인득의 오물투척, 폭행, 폭언 등으로 애를 먹고 있었다.

안인득의 주요 타깃은 윗집인 506호 주민 최모 양(당시 19세)과 그의 숙모 강모 씨(57)였다. 안인득은 윗집에서 자신의 집에 벌레를 뿌린다는 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2018년 9월부터 사건 전까지 다섯 번에 걸쳐 506호 현관문에 계란, 간장 등 오물을 투척했다.

직접 위협도 일삼았다. 2019년 2월 28일, 안인득이 출근을 하는 강 씨에게 계란을 던지고 욕설을 했다. 강 씨는 신고했지만 경찰은 “임대아파트라 이런 신고가 많다. 화해하라”고만 한 뒤 돌아갔다.

3월 10일, 안인득은 주차 시비가 붙은 사람의 얼굴을 가격하고 망치를 휘둘러 특수폭행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형은 경찰에 “동생이 정신병력이 있다”고 알렸지만 경찰은 별다른 조치 없이 안인득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3월 12일과 13일, 안인득은 이틀 연달아 최 양을 따라가며 욕을 했다. 집에 들어가는 최 양을 뒤따라가 초인종까지 눌렀다. 최 양은 1급 시각장애로 한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뇌병변 장애로 몸의 반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고등학생이었다. 13일 강 씨가 경찰에 재차 신고해 “안인득이 더 이상 이런 짓을 못 하게 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경찰은 안인득에 구두 경고를 주는데 그쳤다.

3월 말 안인득은 진주의 한 주방용품점에서 흉기를 샀다. 사건 당일 그가 주민들에게 휘두른 것과 같은 흉기였다.

형은 연락이 닿지 않는 동생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를까 걱정이 됐다. 4월 4, 5일 이틀에 걸쳐 안인득을 입건했던 경찰서에 전화를 했다. “동생을 강제입원 시킬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지만 경찰은 “사건을 검찰에 넘겼으니 검사에게 문의하라”고 답했다.

검찰청 민원실도 책임을 떠넘겼다. 직원은 “검사를 만나더라도 강제입원은 어렵다”며 법률구조공단을 찾아가라고 권했다.

법률구조공단은 “행정기관이 처리해야 한다. 동사무소나 시청으로 가라”고 했다. 동사무소에서는 “강제입원은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사건 당일인 4월 17일 자정이 넘은 시간 안인득은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샀다. 3시간 반 뒤, 안인득은 자신의 집에 불을 질렀다.

안인득에게 집중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던 최 양은 그날 안인득의 칼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세은 씨의 조카이자 민수 씨의 딸도, 두 사람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안인득에 대한 신고 및 사건 진행

매뉴얼이 작동하지 않을 때

정신건강복지법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해칠 위험이 큰 정신질환자의 정신질환자를 자신의 의사에 반해 입원시키는 이른바 ‘비(非)자의 입원’을 허용하고 있다. 환자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는 조치인 만큼 엄격한 절차와 요건을 갖춰야 한다.

이중 ‘행정입원’은 경찰이 정신과 전문의나 전문요원에게 요청해 위험하다고 판단될 경우 지자체장이 절차를 거쳐 최장 2주 간 입원시키는 제도다. 긴급한 상황에는 경찰관과 의사 동의 아래 최장 3일 간 환자를 입원시킨 뒤 계속 입원이 필요한지 결정하는 ‘응급입원’ 제도도 있다.

안인득은 △타인에게 위협을 가한 전력이 있고 △폭행, 욕설 등 공격적 성향이 지속된 경우로 행정입원이나 응급입원을 충분히 검토할 만한 상황이었다.

안인득이 해당됐던 정신질환자 ‘비자의 입원’ 판단 기준

하지만 안인득은 어떤 조치도 받지 않았다. 안인득 본인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정입원과 응급입원 모두 현장에서 무용지물이 됐다.

비자의 입원 중 행정입원은 유명무실하다. 행정입원에는 전문의 진단이 필요한데 정신질환자로 보이는 사람을 전문의에게 강제로 호송할 법적 근거가 없다. 응급입원은 요건이 더 까다롭다.

자·타해 위험이 크고, 상황이 급박해 다른 입원절차가 불가능할 때만 가능하다. 당장 눈앞에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경찰이 인권침해 논란을 무릅쓰고 응급입원 절차를 밟기 어렵다.

이동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가족이 입원시키도록 하는 것이 논란을 피하는 길이기 때문에 행정입원은 입원시킬 가족이 마땅치 않은 경우로 제한된다. 응급입원도 엄격한 절차를 거쳐야 해 활용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까다로운 절차 탓에 현장에서는 대부분 ‘보호입원’이 활용된다. 가족에 의한 보호입원이 전체 비자의 입원의 80~90%를 차지한다. 보호입원은 가족 중에서도 직계혈족, 배우자, 민법상 후견인 중 2명이 신청하고 의사 진단이 있으면 가능하다. 하지만 안인득처럼 혼자 살며 직계혈족이나 배우자가 없는 경우 적용이 불가능하다. 1인 가구가 늘어나는 한국 현실에서 점점 더 실효성이 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백종우 대한신경정신학회 법제이사는 “노부모 중 한 명과 살거나 직계 가족이 없는 조현병 환자들이 사각지대”라며 “1인 가구가 늘며 정신질환자를 보살펴줄 가족이 없어지고 있다. 중증정신질환자에 대한 책임을 가족이 아닌 국가가 지는 ‘국가책임제’가 도입돼야 한다”고 말했다.

선진국에서는 비자의 입원을 신청할 수 있는 권한을 광범위하게 열어둔다. 미국 32개주에서는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자의 입원을 신청할 수 있다. 일본도 ‘정신장애인 또는 그 의심이 있는 사람을 아는 사람은 누구든’ 신청 권한을 인정한다. 영국은 신청권자를 정신보건전문요원 또는 환자의 가족 또는 친지로 규정하는데 직계가족이나 동거인은 물론 형제자매, 조부모, 조카 등이 포함돼 있다.

일반 시민의 안전을 보장하면서도 정신질환자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사법입원제도’ 도입을 제안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법원이 입원을 결정하기 때문에 독립성이 보장되고, 환자 본인이 도움을 받아 자신의 의사를 법정에서 표현할 수 있는 절차도 포함돼 있다. 이동진 교수는 “비자의 입원은 강제조치인 만큼 국가가 책임을 지고 주도하고, 그 안에서 본인과 가족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래치료명령제가 활성화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지자체장이 정신의료기관장의 청구를 받아 비자의 입원 환자가 퇴원하는 대신 최장 1년까지 외래치료를 의무적으로 받도록 하는 제도다. 퇴원한 환자가 아니더라도 의사 판단으로 위험한 환자는 외래치료를 의무적으로 받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장애인 인권단체도 어쩔 수 없는 경우 비자의 입원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다만 그런 상태까지 가지 않도록 사전에 관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의 박환갑 사무국장은 “비자의 입원이 필요한 수준까지 상태가 악화되기 전에 미리 상담하고 외래치료를 받도록 하는 등의 관리가 필요하다”며 “상태가 악화된 환자를 입원시키는 조치는 필요하지만, 폭력적인 병원 이송 과정, 환자를 폐쇄병동에서 강제로 치료하는 방식 등 문제점이 먼저 개선돼야 한다” 지적했다.

웅덩이를 만들지 않는 법

사건 후 나라가 피해자이자 유족인 세은 씨와 민수 씨에게 진 책임은 치료비 5000만 원이 전부다. 방화죄, 살인죄, 상해죄 등 강력범죄피해자는 연 1500만 원, 총 5000만 원 한도에서 치료비를 받을 수 있다. 살해된 조카를 구하려다 칼에 맞아 중상을 입은 506호 강 씨는 수술과 재활치료가 이어져 이미 5000만 원을 다 썼다. 강 씨의 딸은 때때로 전화로 안부를 묻는 세은 씨에게 자꾸만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저희 같은 사람들은 정신과 상담하고 약 먹으면 돼요. 근데 506호 살던 숙모는 뇌수술을 또 해야 할 수도 있고, 손에 감각이 안 돌아와서 재활치료도 계속 받아야 한대요. 그런 분들은 치료비를 평생 받을 수 있어야 하잖아요. 나라에선 그 조차도 안 된다고 하대요.”

부족한 치료비, 어려워진 생계보다도 힘들었던 건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왜 주민들의 신고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는지, 왜 안인득은 제때 치료받지 못했는지, 속 시원히 답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경남지방경찰청 진상조사팀이 사건 이후 조사를 벌여 경찰 조치가 미흡했다고 인정했지만 관련 경찰 5명을 경징계하고 2명을 경고 처분 하는데 그쳤다.

세은 씨와 민수 씨는 소송을 준비하기 시작한 뒤에야 대상 없는 원망의 정체를 조금씩 확인하고 있다. 다른 누군가는 이들이 빠졌던 웅덩이에 다시 빠지지 않도록, 1000일 분의 고통을 다져 길을 고르고 있다.

발간일 2022년 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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