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눈매, 촉촉한 입술, 잘 정돈된 색색의 머리.

언제 어디서 봐도 팬들에게 완벽한 아이돌이 되기 위해
매일 새벽 거울 앞에 앉는다.

내 주머니 속의 아이돌

T1419는 올해 1월 데뷔한 남자 아이돌 그룹이다. 걸그룹 모모랜드를 키운 MLD엔터테인먼트가 글로벌 음원 유통사인 소니뮤직과 함께 기획했다. 세계무대를 목표로 한국인 5명, 일본인 4명으로 구성했다. 일본 멤버를 뽑던 2019년 도쿄와 오사카에는 지원자가 5000명 넘게 몰렸다.
데뷔는 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팬을 직접 만나기 어려운 상황. 이 때문에 ‘영상통화 팬 사인회’로 팬들을 주로 만났다.
스마트폰은 한 멤버 앞에 1분 30초씩 머문다. 스태프는 알람시계로 이 시간을 체크하면서 스마트폰을 옆 멤버에게 전달한다. 팬들은 이렇게 멤버 모두를 차례로 만난다.

4월 16일 저녁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영상통화 팬 사인회가 진행됐다. 영상으로 이들과 만나는 기회를 잡게 된 팬들은 모두 30명. 국적은 한국 미국 일본 캐나다 네덜란드 독일 스페인 등 7개국이었다.
“보쿠가 우타가 스키데스게도(저는 노래는 좋아하지만). 음…
가, 가레와(그는)….”
아이돌 T1419의 한국인 멤버 케빈이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일본어로 대화 중이었다. 화면 속 상대방을 가리키며 오른손을 뻗었지만 ‘당신’이라는 일본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당신도 노래를 좋아해야 합니다. 와카리마스카(이해하셨나요)
잠시 겸연쩍은 미소를 짓던 케빈은 시간이 다 됐다는 스태프의 손짓에 화면 속 팬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스미마센 지칸가 피니시, 아리가토 고자이마스(미안하지만 시간이 다됐습니다. 고맙습니다).

통화를 마치자마자 케빈은 옆에 앉은 한국인 멤버 건우에게 물었다.

“‘당신’이 일본어로 뭐였지?”
“아나타.”
“아, 맞다.”
14시간전
저녁에 팬 사인회가 열린 이날 T1419의 하루는 해가 뜨지 않은 오전 5시부터 시작됐다.
케빈의 휴대전화에는 오전 5시, 오전 5시 30분 둘로 갈린 사다리 타기 결과가 남아 있었다. 전날 9명의 멤버들은 평소처럼 ‘사다리 타기’로 먼저 미용실로 출발할 선발대, 후발대로 나눴다. 잠이 부족해 30분이라도 더 자기 위해서다.
싱글 2집으로 컴백한 지 3주차.

멤버들은 전날에도 음악방송과 영상통화 팬 사인회, 안무 연습 등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일본인 멤버 카이리는 옆에 있던 기자에게 “안 졸려요”라며 웃음을 보였지만 따뜻한 헤어드라이어 바람이 불어오자 곧 눈이 감겼다. 생방송은 오후 5시지만 리허설을 위해 오전 9시 전에 방송국에 출근한다.
생방송 무대를 마치고 오후 6시. 배달음식으로 저녁을 해결한 멤버들은 사인회에 당첨된 팬에게 보낼 앨범 30개에 각자 사인을 한다. 오후 8시에 시작한 사인회는 오후 10시가 넘어 끝났다.
사인회가 끝나고 T1419의 ‘영어 능력자’로 꼽히는 레오, 시안이 서로를 바라보며 영어 대화를 나눈다. 오후 11시부터 시작하는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을 통해 미국, 남미 팬들을 만나기 위해 영어로 입을 푸는 것.

이날 라이브방송 주제는 한국의 편의점 음식 리뷰였는데 남미 팬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휙휙 지나가는 스페인어 댓글을 읽을 줄 몰라 미안해하던 둘은 마지막 인사만큼은 “그라시아스(감사합니다)”라며 웃었다.
“예전에는 아이돌이 콘서트장에서 보고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사라지는 존재였다면 요즘 아이돌은 주머니 속에서도 꺼내볼 수 있는 존재예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팬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볼거리(콘텐츠)를 제공해야 하고 팬과 소통해야 하죠. 팬들도 그런 아이돌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연인 대하듯 정성을 쏟는 거죠.”(이형진 MLD엔터테인먼트 대표)
올해 1월 첫 비대면 팬 사인회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감사합니다’만 반복했다던 T1419도 시간이 흐르면서 팬들에게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멘트를 건넬 정도로 사인회가 즐겁고 익숙한 일이 됐다. “(물병을 들고) 이거 마시면 나랑 사귀는 거다?” “난 평소에 다정한 사람이야. 이런 모습에 빠져들게 될 거야.” “언능 먹고 자. 그게 제일 건강해지는 길이야.”
“팬들이 용기도 불어넣어 주고, 친해지니 저도 자신 있게 다정한 말도 건네요. 물론 장난인 건 서로 알죠. 팬과 저 사이 허락된 시간이 1분 30초인데, 짧은 순간만이라도 서로 즐거워하는 거예요.”(멤버 온)
멤버들은 개인 SNS로 팬들에게 “다들 뭐해요”라며 안부를 묻고 자신이 듣고 있는 노래 플레이리스트도 공유한다. 멤버의 생일, 데뷔 100일은 물론 어린이날, 어버이날도 라이브방송으로 함께 기념한다. 유튜브엔 멤버들의 새로운 모습이 담긴 자체 제작 예능이나 비하인드 영상이 줄줄이 이어진다. 뮤직비디오만 재생해도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나오는 이들의 영상을 보다 보면 멤버 개개인이 ‘민초파’(민트초코를 좋아하는)인지 ‘반민초파’인지도 알게 된다.
‘SNS, 유튜브 인지도 상승 → 팬덤 확보 → 해외 음원차트 진입 → 일본 돔 공연 → 미주, 유럽 공연’

BTS의 세계적 성공을 기점으로 이 경로는 모든 아이돌이 밟아야 할 ‘필수 코스’가 됐다. 방시혁 하이브 의장은 2019년 타임지 인터뷰에서 BTS 세계관 속 가수와 팬을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BTS나 K팝 아이돌의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라이프스타일 일부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런 열망을 채워줄 수 있는 상품은 시장에 없다. 물론 일반적인 가수들의 팬들도 콘서트에 가고 앨범도 사고 티셔츠도 산다. 하지만 K팝 아이돌 그룹 팬들은 아이돌과 더 친해지고 싶어 한다. 결과적으로 BTS 팬덤과 함께하는 일이 빅히트의 가장 주된 서비스 중 하나다.”
T1419는 최근 팬들과 카카오톡 메시지도 주고받기 시작했다. 멤버들이 팬 여러 명에게 동시에 답하는 방식이 아니라 실제 카카오톡과 같은 1 대 1 대화다. 팬들이 공식 채널로 특정 멤버에게 메시지를 보내면 그 멤버가 직접 답한다. 보통 2~5일, 운이 좋으면 몇 분 만에도 답이 온다. 팬들은 자신이 보낸 메시지에 답이 오면 팬카페에 내용을 공개하기도 한다. 취재팀도 시안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냈다.
박희영 MLD엔터테인먼트 부대표는 “10대들은 ‘직접’의 중요성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세대다. 익숙하고 친근한 플랫폼을 찾은 게 카카오톡이다. ‘진짜 친구와 카톡하는 기분이다’라는 팬들 반응을 볼 때마다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각자가 가진 스마트폰으로 답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멤버들은 소속사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짧게는 30분, 길게는 몇 시간씩 답장을 쓴다. 지방 팬 사인회 등으로 오랜 기간 사무실을 비워야 할 때는 노트북, 태블릿 컴퓨터를 활용한다.

“수도 못 셀 만큼 많은 메시지가 와요. 그래도 일일이 답장하는 게 재미있어요. 우리를 응원해주는 팬들, 좋은 사람들이 우리한테 관심을 갖고 에너지를 주는 거잖아요.”(멤버 레오)
팬들은 아이돌과 가까이서 희로애락을 함께한다. 기쁜 일에 내일처럼 축하해주고 슬픈 일에 아이돌을 대신해 집단으로 목소리도 낸다.
4월 20일 T1419의 데뷔 100일 기념 브이라이브를 앞두고 케빈은 진통제를 먹고 쉬고 있었다. 앞선 방송무대에서 춤을 추다 왼쪽 어깨 부상을 당했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방송 중 여러 번 아픈 어깨에 손이 갔고 “케빈 괜찮아요?” “어디 안 좋은가요?”라고 묻는 댓글이 실시간으로 달렸다.

다음 날 음악방송에서 케빈이 왼손을 허리춤에 붙이고 춤을 추자 곧 트위터에는 ‘#PROTECTKEVIN’ 해시태그와 함께 ‘케빈을 쉬게 해달라’는 목소리가 줄을 이었다. MLD엔터테인먼트는 팬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22일 “25일 예정된 음악방송을 끝으로 음악방송 활동을 종료한다”고 발표했다.

지난달 13일 오후 5시 서울 마포구 누리꿈스퀘어. 2집 마지막 공식 일정으로 오프라인 대면 팬사인회가 열렸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50명만 초대했다. 이곳에 온 팬들은 소위 ‘대포’라고 불리는 망원렌즈를 단 고화질 DSLR로 자신의 ‘최애(가장 좋아하는 멤버)’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순번 1번을 받은 직장인 레정(팬카페 닉네임·23)은 “선착순이라 PC방에서 신청 링크가 열리는 시간에 맞춰 수강 신청하듯이 ‘새로고침’ 버튼을 눌렀다”고 했다. 옆자리 2번을 받은 순애(팬카페 닉네임·23)는 “T1419를 보면 진짜 열심히 한다는 게 느껴진다. 콘텐츠가 많고 팬들과 카톡도 해준다. 평생 함께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T1419 데뷔 5개월 만에 팬들도 ‘이름’을 얻었다. 팬 투표로 뽑힌 ‘에델바이스’다. 멤버들은 SNS에 "잘 자요 에델" "행복한 밤 되세요 에델바이스! 사랑해요" "우리 에델들!! 점심 맛있게 먹어요!"라며 안부를 전한다.

발간일 2021년 07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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