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어느 가을 밤. 박 씨는 경찰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동네의 한 PC방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2000년 즈음부터 가출을 일삼던 아들이 PC방의 한 구석 자리에 태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PC방 요금 몇만 원이 없어 신고나 당하고 있다니…. 5년 만에 만난 아들이 반가웠지만 한편으론 어이가 없었다. 혀를 끌끌 찼다.
돈을 물어주고 나가자고 했더니 아들은 하던 게임을 마저 해야 한다고 했다. 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애타게 기다린다고 했지만 아들은 고개를 저었다.
1977년생, 벌써 스물여덟 살이나 먹은 녀석. 어릴 때야 완력으로 끌고 올 수 있지만 이젠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박 씨는 한 번 더 부탁했다. ‘아빠랑 같이 집에 가서 자초지종 얘기 좀 하자’고. 아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흘만 시간을 주세요. 다 정리하고 갈게요.
박 씨는 그 말을 믿었다. 집에서 엄마랑 기다리고 있겠다며 PC방을 나섰다. 하지만 그게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사흘이 천 번 넘게 지나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2018년 10월 법원의 실종선고로 박 씨의 아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됐다.
박 씨의 아들은 어릴 때부터 ‘천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했다. 박 씨는 아들이 머리도, 외모도 자신을 똑 닮았다고 생각했다. 학창 시절부터 은행 입사 이후 늘 성공가도를 달려온 자신처럼 아들도 승승장구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아들은 중학교 때부터 그런 기대와는 점점 멀어졌다. 박 씨 부부가 부담을 주지 않으려 떨어지는 성적을 모른 척하는 사이 등수는 최하위권으로 떨어졌다. 수학 영어 등 과외를 시켜봤지만 성적은 제자리였다. ‘공부는 싫어도 운동은 하겠지’ 싶어 보낸 태권도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박 씨가 태권도 관장에게 아이가 잘 다니고 있는지 물어보니 “안 나온 지 오래됐는데 모르셨어요? 태권도 오던 시간에 놀러 다니는 것 같던데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박 씨는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어서 나름대로 노력도 해봤다. 친구와 선생님들을 붙잡고 아이가 뭘 하고 다니는 건지, 무슨 불만이 있는 건지, 뭘 원하는 건지 물어봤다. 하나같이 “잘 모르겠다”는 말만 돌아왔다.
그저 사춘기라 하기엔 방황이 길어졌다. 고등학교 생활도 중학교와 다를 바 없었다. 1996년 아들은 가까스로 비수도권의 한 사립대에 들어갔다. 박 씨 부부는 아들을 서둘러 군대에 보냈지만 적응하지 못했다. 탈영을 하는 바람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은 것. 제대한 뒤에도 예비군 훈련에 연달아 빠져 2001년과 2002년 각각 벌금을 50만 원씩 냈다.
우리 가족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
우리 부부가 아이를 잘못 키웠나···.
박 씨는 수없이 자문했다. 하지만 아이에게 부족한 거 없이 다 해줬다. 오히려 경제적으로 풍족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손 한 번 대기는커녕 큰소리를 낸 기억도 별로 없었다. 아이와 크게 다툰 기억도 없었다. 은행 일이 바빠 세심하게 아이를 돌보진 못했지만, 그 시대 아버지들은 다 그렇게 살아왔다.
답을 찾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점차 화가 났다. 아들을 보면 한숨부터 나왔다. 시골에서 태어나 노력 하나로 도시의 성공적인 삶을 일군 박 씨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을 똑 닮은 아들이 성실하게 살아가지 않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갈수록 아들을 보면 싫은 소리가 나왔다.
어느 날 박 씨 부부가 아침 방문을 열어보니 아들이 없었다. 아무 소리도 없이 오밤중에 집을 빠져나간 것이다. 마치 수증기 같았다. 이내 돌아왔지만 또 사라졌다. 처음엔 며칠, 나중엔 몇 달. 점점 집을 떠나 있는 기간이 길어졌다. 집 안에 아들의 흔적이 점점 희미해졌다. 아들도, 흔적도, 추억도 엉키고 뒤섞여 증발하는 것 같았다.
사라진 건 아들뿐이 아니었다. 집안 물건들도 하나씩 자취를 감췄다. 처음엔 사소한 생필품이, 나중엔 귀중품이. 박 씨가 취미로 사들인 고가의 카메라, 젊은 시절부터 모은 희귀한 우표집. 지금 시세로 치면 각각 수백만 원은 될 것들이었다.
그러나 경찰에 신고한 적은 없다. 아니, 신고할 수가 없었다. 누구 소행인지 뻔한데. 자식 욕은 결국 부모 얼굴에 침 뱉기 아닌가. 누군가 ‘부모 때문에 자식이 잘못됐다’고 할까 봐 아들의 잘못을 들추려 하지 않았다. 물건이 사라져도 그냥 언젠가 잃어버린 것 같다고, 집 안에 있는데 못 찾는 것 같다고, 그 물건 별거 아니라고 묻어두기에 바빴다.
박 씨는 시간이 지나 이제야 돌이켜본다. 아들이 증발한 이후 자신의 허물을 덮기에 급급했던 건 아닌지. 처음 아들이 사라졌을 땐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하지만 증발이 반복되면서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누군가 점점 알게 되는 게 싫었다.
가끔씩 사정을 아는 이웃이나 박 씨의 직장 동료들이 물었다. “아이고 형님. 아들은 어떻게 됐어?”, “애 때문에 속상하겠네.” 흔한 안부 인사였을지 모른다. 정말 걱정돼서 도와주려고 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말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박 씨는 PC방에서 만난 아들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자 이웃과 동료를 피해 도망가고 싶은 마음만 커졌다. 어차피 아들의 흔적도 점점 희미해져 가는 집, 미련도 없었다.
아들이 2005년 PC방에서 사라진 뒤 박 씨는 아는 사람들을 피해 충북의 한 시골로 거처를 옮겼다. 15년째 아내와 둘이 고요히 산다. 지금의 이웃들은 박 씨의 잘나가던 과거도, 아들의 질풍노도 같던 과거도 모른다. 이젠 아들의 안부를 묻는 사람이 없다.
박 씨는 얕은 잠결에 까무룩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