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씨(60·여)와 박 씨(69)는 하루에 몇 번씩 스스로에게 묻는다.
밥을 먹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심지어 얕은 잠을 자면서도 생각한다.
  • 살아있을까?
    왜 사라졌을까?
  • 그때 붙잡았어야
    하는 걸까?
  • 내가 뭘 잘못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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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에서
올해 60대에 접어든 윤 씨는 8년째, 내년에 70대에 접어드는 박 씨는 15년째 같은 질문의 방에 갇혀 있다. 자식을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에 묻은 이의 숙명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식이 증발해버린 부모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어떨 때는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겠다 싶다. 그러나 자식만은 죽은 게 아니라 그저 사라졌을 거라는 믿음이 부모의 생을 지탱하는 한 가닥 희망이다.

증발한 자들에게는 저마다 이유가 있다. 그러나 남겨진 자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동아일보는 ‘20대 아들’을 놓친 어머니와 아버지를 각각 만나 ‘남겨진 자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박 씨는 아들의 이름을 공개하길 원치 않았고, 윤 씨는 “언론을 통해서라도 아들을 찾고 싶다”며
아들의 이름(홍민석)을 공개해도 된다고 취재팀에 밝혔다.

어머니의 기억… 들을 수 없는 대답
2012년 현충일, 지하철 미화원인 윤 씨는 아주 오랜만에 아들과 밥 한 끼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계속되는 야근에 도통 얼굴을 못 본 아들이었다. 동생과 조카도 불러 집 근처 베트남 음식점에 갔다. 1987년 생, 당시 스물다섯 살이던 아들은 네 살 어린 사촌 동생과 죽이 잘 맞았다. 그날도 동생과 장난을 치며 쌀국수 한 그릇을 싹 비웠다. 다 같이 식당을 나서는데 아들이 “가보겠다”며 혼자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어디 가냐고 묻지 않았다. 당연히 서빙 일을 하던 레스토랑으로 출근하려니 했다.

그 뒤로 닷새간 윤 씨는 아들과 연락하거나 만나지 못했다. 직장이 파업에 들어가 서울시청 광장에서 밤샘 농성을 하는 날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 다 평소 살갑게 연락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윤 씨도 야근이 많고, 아들도 가끔 외박하는 날이 있어 각자 ‘할 일이 있으려니’ 하며 지내온 모자였다.

파업이 끝나 집에 오니 우편함에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민석이가 계속 출근을 하지 않네요. 이 번호로 연락 좀 주세요.

아들이 일하던 레스토랑 점장이 붙여둔 것이었다. 그제야 아들의 번호를 눌렀다.

지금 거신 전화는 고객의 요청으로 당분간 착신이 정지되어 있습니다.

아들 대신 상냥한 안내원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윤 씨는 아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보험회사, 식당 등 곳곳에서 일하느라 바빴다. 아들은 이모할머니 손에 자주 맡겨졌다. 그래도 어릴 적 가장 큰 말썽이 어쩌다 학원을 빼먹고 오락실에 가는 것뿐일 정도로 모난 데 없는 아이였다.

한창 사춘기이던 14살, 아들은 부모의 이혼을 겪었다. 싱글맘이 된 윤 씨는 안정적인 일자리가 필요했다. 이혼 후 곧바로 지하철 청소를 시작하면서 밤낮이 바뀐 삶이 시작됐다. 매일 저녁 10시에 나가 다음 날 오후 1시에 돌아오는 고단한 나날. 윤 씨가 퇴근해 반찬을 챙겨 놓고 잠들면 아들은 학교에서 돌아와 혼자 밥을 먹었다. 윤 씨는 일주일에 하루 쉴 때도 죽은 듯 잤다. 모자가 마주 앉아 밥을 먹는 날은 한 달에 한 번 저녁 식사 정도였다.

아들이 자칫 엇나갈 수도 있었으련만, 오히려 더 의젓하게 자랐다. 중학생 때 “해외에 가보고 싶다”더니 혼자 일본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성숙한 아이였다.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고 윤 씨가 2년 정도 주간 근무를 하게 됐다. 같이 저녁을 먹는 날이 늘었지만 대화는 늘지 않았다. 아들은 자기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윤 씨는 ‘고등학교 남자애가 다 그렇지’라고 생각했다.

딱 한 번 아들이 고집을 부린 적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자마자 “죽어도 학교에 안 가겠다”고 했다. 윤 씨는 이유를 캐물었지만 역시 아들은 말이 없었다. 석 달 정도 제발 학교에 가라고 설득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윤 씨가 아들 담임을 찾아갔더니 앞뒤 설명 없이 “전학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전학 간 학교에서는 별 탈 없이 졸업했다.

아들은 2006년 전남의 한 전문대에 입학했다가 적성에 안 맞는다며 1년 만에 자퇴했다. 하지만 소믈리에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와인을 배우기 위해 고급 레스토랑에서 열심히 일했으며, 틈틈이 금융 관련 자격증 공부도 했다. 입대한 지 얼마 안 돼 보낸 편지에는 “집에서 대화도 잘 안 하는 아들이지만 쑥스러워 그런 거니 이해해 달라. 효도하겠다”는 의젓한 위로도 담겨 있었다. 아들은 제대 후 공부를 하더니 2011년 서울의 한 대학 축산학과에 입학했다. 윤 씨는 등록금 430만 원을 마련하는 게 버겁지만 행복했다.

윤 씨는 이런 아들이 사라졌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들의 친구들, 아들이 다니던 성당 등을 찾아 헤맸다. 그러던 중 몰랐던 사실을 발견했다. 아들이 2011년 다시 입학했다던 대학은 ‘그런 사람이 등록한 적이 없다’고 했다. 현금 서비스, 카드 리볼빙 등 도합 600만 원에 달하는 각종 고지서도 날아왔다.

윤 씨는 어느 정도 아들을 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아들을 찾으면 찾을수록 몰랐던 모습만 나타났다. ‘어디 가서 내가 엄마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창피함이 물밀 듯 밀려왔다.

아들도 거짓말과 빚이 창피해서 자취를 감췄을까? 윤 씨는 아들이 미안해서, 혹은 부끄러워서 잠시 떠났지만 곧 다시 돌아올 거라 믿었다. 그런데 아들은 사라진 지 2년 뒤 아버지가 간암으로 세상을 떴을 때도 장례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죽은 건가’, ‘다단계나 이상한 종교에 빠졌나’라는 생각에 윤 씨는 괴로웠다. 하지만 아들을 찾기 위해 매일 전단지를 돌리는 엄마가 되기에는 삶이 고단했다. 아들에 대한 악몽이 머릿속을 휘감을 때는 미친 듯이 걸레질을 했다. 그래도 아들 또래 청년이 지나가는 것만 보면 무언가 울컥 치받았다. 아들이 사라진 뒤 몇 개월 지난 어느 날. 윤 씨는 갑자기 괘씸한 마음이 폭발해 아들 방에 있던 소지품들을 마구 내다버렸다. 사진 몇 장과 공기계인 휴대전화 하나만 남았다. 그 뒤로 8년을 감정을 마비시킨 채 살아왔다.

그러다 지난 6월 윤 씨는 ‘아들을 같이 찾아보자’는 동아일보 취재진의 제안을 받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삶에 지쳐 눌러놨던 기억들이 다시 살아났다. 서른이 넘었을 아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윤 씨는 취재팀과 함께 아들이 남겨놓은 휴대전화를 데이터 복구업체에 맡겼다. 어렵게 잠금 패턴을 풀었는데, 확인 결과 아들의 것이 아니었다. 유일한 단서라고 생각했는데 허탈해졌다. 국세청에서 ‘소득금액증명원’ 서류를 발급받았다. 아들이 전전한 직장이 5장짜리 서류에 빼곡히 남아 있었다. 그곳들을 뒤졌지만 아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윤 씨는 유전자(DNA) 검사도 받았다. 아들의 생사라도 알고 싶어서였다. 3주 뒤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원이 갖고 있는 데이터베이스에 친자 관계를 이루는 DNA는 없다”고 알려왔다. 절망과 희망이 동시에 찾아왔다.

윤 씨는 아들이 사라진 뒤 두 번 이사를 했다. 이제 아들의 방은 없지만 거실 서랍장 한쪽은 아들의 공간이다. 유치원 졸업사진을 담은 큰 액자, 폴라로이드 사진 몇 장, 그리고 아들이 언제 건네줬는지 모를 카네이션 조화가 놓여 있다.

윤 씨는 아들이 성인이 된 후 같이 찍은 사진이 없는 게 못내 아쉽다. 원래는 딱 한 장 있었다. 2009년 여름 강원도 인제의 군부대에 면회를 가 함께 찍은 사진. 윤 씨는 그 사진이 저장된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것이 지금도 한스럽다.

윤 씨는 지금에서야 형제도 없는 아들이 외로웠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매일 저녁 아들은 홀로 식탁에 앉았을 테다. ‘반듯한 아이니까 괜찮겠지’ 했던 무심함이 후회로 돌아왔다.

윤 씨는 2019년 3월 아들이 실종 선고를 받기 전까지 종종 아들의 휴대전화 번호를 누르곤 했다. 여전히 ‘고객의 요청으로 착신이 정지되어 있다’는 상냥한 안내가 흘러나올 뿐이지만. 윤 씨는 전화기를 붙들고 묻는다.
  • ‘ 살아 있니? 왜 사라졌니?
    그때 식당에서 붙잡았어야 하는 걸까?
  • 어린 네가 의젓하다고 그저 무심했던 엄마가 미웠니?
    엄마가 너의 속을 조금 더 알았다면 지금과
    달라졌을까? ’
아들이 돌아오기 전까진 영원히 들을 수 없을 대답이다.
아버지의 기억… 알 수 없는 질문
2005년 어느 가을 밤. 박 씨는 경찰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동네의 한 PC방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2000년 즈음부터 가출을 일삼던 아들이 PC방의 한 구석 자리에 태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PC방 요금 몇만 원이 없어 신고나 당하고 있다니…. 5년 만에 만난 아들이 반가웠지만 한편으론 어이가 없었다. 혀를 끌끌 찼다.

돈을 물어주고 나가자고 했더니 아들은 하던 게임을 마저 해야 한다고 했다. 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애타게 기다린다고 했지만 아들은 고개를 저었다.

1977년생, 벌써 스물여덟 살이나 먹은 녀석. 어릴 때야 완력으로 끌고 올 수 있지만 이젠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박 씨는 한 번 더 부탁했다. ‘아빠랑 같이 집에 가서 자초지종 얘기 좀 하자’고. 아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흘만 시간을 주세요. 다 정리하고 갈게요.

박 씨는 그 말을 믿었다. 집에서 엄마랑 기다리고 있겠다며 PC방을 나섰다. 하지만 그게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사흘이 천 번 넘게 지나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2018년 10월 법원의 실종선고로 박 씨의 아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됐다.

아들이 증발한 후 박 씨가 충북의 한 시골 마을에 세운 개인 미술관.
박 씨의 아들은 어릴 때부터 ‘천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했다. 박 씨는 아들이 머리도, 외모도 자신을 똑 닮았다고 생각했다. 학창 시절부터 은행 입사 이후 늘 성공가도를 달려온 자신처럼 아들도 승승장구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아들은 중학교 때부터 그런 기대와는 점점 멀어졌다. 박 씨 부부가 부담을 주지 않으려 떨어지는 성적을 모른 척하는 사이 등수는 최하위권으로 떨어졌다. 수학 영어 등 과외를 시켜봤지만 성적은 제자리였다. ‘공부는 싫어도 운동은 하겠지’ 싶어 보낸 태권도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박 씨가 태권도 관장에게 아이가 잘 다니고 있는지 물어보니 “안 나온 지 오래됐는데 모르셨어요? 태권도 오던 시간에 놀러 다니는 것 같던데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박 씨는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어서 나름대로 노력도 해봤다. 친구와 선생님들을 붙잡고 아이가 뭘 하고 다니는 건지, 무슨 불만이 있는 건지, 뭘 원하는 건지 물어봤다. 하나같이 “잘 모르겠다”는 말만 돌아왔다.

그저 사춘기라 하기엔 방황이 길어졌다. 고등학교 생활도 중학교와 다를 바 없었다. 1996년 아들은 가까스로 비수도권의 한 사립대에 들어갔다. 박 씨 부부는 아들을 서둘러 군대에 보냈지만 적응하지 못했다. 탈영을 하는 바람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은 것. 제대한 뒤에도 예비군 훈련에 연달아 빠져 2001년과 2002년 각각 벌금을 50만 원씩 냈다.

우리 가족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

우리 부부가 아이를 잘못 키웠나···.



박 씨는 수없이 자문했다. 하지만 아이에게 부족한 거 없이 다 해줬다. 오히려 경제적으로 풍족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손 한 번 대기는커녕 큰소리를 낸 기억도 별로 없었다. 아이와 크게 다툰 기억도 없었다. 은행 일이 바빠 세심하게 아이를 돌보진 못했지만, 그 시대 아버지들은 다 그렇게 살아왔다.

​답을 찾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점차 화가 났다. 아들을 보면 한숨부터 나왔다. 시골에서 태어나 노력 하나로 도시의 성공적인 삶을 일군 박 씨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을 똑 닮은 아들이 성실하게 살아가지 않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갈수록 아들을 보면 싫은 소리가 나왔다.

아들이 증발하기 전 박 씨 가족이 함께 살던 대전의 한 빌라. 동아일보 취재팀은 경찰과 함께 이곳을 방문했지만 특별한 단서를 찾지는 못했다.
어느 날 박 씨 부부가 아침 방문을 열어보니 아들이 없었다. 아무 소리도 없이 오밤중에 집을 빠져나간 것이다. 마치 수증기 같았다. 이내 돌아왔지만 또 사라졌다. 처음엔 며칠, 나중엔 몇 달. 점점 집을 떠나 있는 기간이 길어졌다. 집 안에 아들의 흔적이 점점 희미해졌다. 아들도, 흔적도, 추억도 엉키고 뒤섞여 증발하는 것 같았다.

사라진 건 아들뿐이 아니었다. 집안 물건들도 하나씩 자취를 감췄다. 처음엔 사소한 생필품이, 나중엔 귀중품이. 박 씨가 취미로 사들인 고가의 카메라, 젊은 시절부터 모은 희귀한 우표집. 지금 시세로 치면 각각 수백만 원은 될 것들이었다.

그러나 경찰에 신고한 적은 없다. 아니, 신고할 수가 없었다. 누구 소행인지 뻔한데. 자식 욕은 결국 부모 얼굴에 침 뱉기 아닌가. 누군가 ‘부모 때문에 자식이 잘못됐다’고 할까 봐 아들의 잘못을 들추려 하지 않았다. 물건이 사라져도 그냥 언젠가 잃어버린 것 같다고, 집 안에 있는데 못 찾는 것 같다고, 그 물건 별거 아니라고 묻어두기에 바빴다.

박 씨는 시간이 지나 이제야 돌이켜본다. 아들이 증발한 이후 자신의 허물을 덮기에 급급했던 건 아닌지. 처음 아들이 사라졌을 땐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하지만 증발이 반복되면서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누군가 점점 알게 되는 게 싫었다.

가끔씩 사정을 아는 이웃이나 박 씨의 직장 동료들이 물었다. “아이고 형님. 아들은 어떻게 됐어?”, “애 때문에 속상하겠네.” 흔한 안부 인사였을지 모른다. 정말 걱정돼서 도와주려고 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말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박 씨는 PC방에서 만난 아들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자 이웃과 동료를 피해 도망가고 싶은 마음만 커졌다. 어차피 아들의 흔적도 점점 희미해져 가는 집, 미련도 없었다.

아들이 2005년 PC방에서 사라진 뒤 박 씨는 아는 사람들을 피해 충북의 한 시골로 거처를 옮겼다. 15년째 아내와 둘이 고요히 산다. 지금의 이웃들은 박 씨의 잘나가던 과거도, 아들의 질풍노도 같던 과거도 모른다. 이젠 아들의 안부를 묻는 사람이 없다.

박 씨는 얕은 잠결에 까무룩 생각한다.
  • ‘ 살아 있을까? 왜 사라졌을까?
    그때 PC방에서 붙잡았어야 하는 걸까?
  • 혹시 어린 아들이 나와 똑같을 거라 믿었던 내 착각이
    아들의 성장 과정을 짓눌렀던 건 아닐까?
  • 혹시 어른이 된 아들을 부끄러워했던 못난 내가
    아들이 돌아오는 길을 막았던 건 아닐까? ’
아들이 돌아오기 전까진 영원히 알 수 없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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