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로 가는 길 연습실에서 보낸 9년 10번이나 무산된 데뷔 버티다 끝내 부러졌던 그녀는 일어설 수 있을까

꽃다운 스무 살이 반갑지 않았다

2016년

그날도 5년 차 연습생 송선은 지하 연습실에 있었다. 회사에 갓 들어온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가 연습실 복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회사 매니저가 송선을 따로 불렀다.

“여기 회사인데 애가 저렇게 떠들고 뛰어다니게 놔둬도 되겠니?”

송선의 입가에 “나도 아직 애기인데…”라는 말이 맴돌았다. 불과 몇 달 전 스무 살이 됐을 뿐이었다. 회사 매니저는 “너도 이제 성인이니까 애들 좀 관리해”라고 했다.

복도를 뛰어다니던 아이와 송선은 일곱 살 차이였다. 하지만 둘 다 똑같은 아이돌 연습생이었다.

송선은 2012년 중학교 3학년 때 한 기획사에 캐스팅됐다. 이듬해부터 데뷔를 전제로 집중훈련을 하는 ‘데뷔조’ 생활을 했다. 눈앞에 오는 듯한 데뷔는 오지 않았고 그사이 연습실에는 어린 동생들이 늘어갔다.

“아이돌이 어리잖아요. 성인이 되고부터, 아무래도 성인이라는 타이틀이 조금…. 아 나는 나이 많아서 아이돌 못 해, 이런 느낌이….”

우리나라 아이돌 그룹의 대다수는 미성년자 때 데뷔한다. 10대 아이돌 지망생들을 발굴한 뒤 합숙훈련으로 실력을 키우고 일부를 데뷔시키는 시스템은 K팝의 독보적인 특징 중 하나다.

“블랙핑크도 BTS도 그렇게 4, 5년 훈련을 받았으니까 아이돌 팝에서는 경쟁 상대가 없을 정도로 잘하는 거죠. 유례가 없어요. 유럽에선 아동 관련 노동 규율이 엄격해서 10대를 아티스트로 만드는 게 불가능해요. 일본은 자국 음악시장으로 먹고살 수 있어서 우리만큼 치열하지 않죠. 데뷔 전부터 완제품으로 만드는 제작 시스템은 한국이 전 세계적으로 유일해요.”(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아이돌은 연습실에서 무르익는다

2020년
9월

송선은 연습생 9년 차이던 지난해 가을 “더 이상은 못 하겠다”며 연습실을 떠났다.

“너무 오래 해서…. 거의 하루 종일 연습실에만 있단 말이에요. 어디 가지도 못 하고 또래 친구들처럼 먹으러 다니거나 쇼핑을 갈 시간이 없었어요. 아무래도 단체생활이니 1명이 빠지면 불이익이 있어요. 데뷔를 목적으로 열심히만 했었던 게…. 그냥 쉬고 싶었어요.”

아이돌 그룹 연습실은 시끄러운 음악과 덤블링이 동반되는 격렬한 안무 탓에 층고가 높은 지하 공간에 주로 마련된다. 단체 안무 연습을 위한 큰 연습실 옆에 방음 시설을 갖춘 1, 2평 남짓한 노래 연습용 방이 따로 딸려있다. 오전에 ‘출근’하면 밤까지 이어지는 체력 훈련, 보컬 수업, 개인·단체 안무 연습, 한국어·외국어 수업이 이 공간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햇볕을 쬘 수 있는 시간은 외부 교육을 받으러 오고가는 시간 정도가 전부다.

월말에는 정기적으로 평가를 받는다. 노래와 춤 등이 한 달간 얼마나 늘었는지 연습실에서 테스트한다. 계속 낮은 평가를 받으면 ‘지하실 생활’에서도 퇴출이다. 수많은 연습생 가운데 데뷔 준비생을 뽑는 데뷔조 평가는 더욱 치열하다.

송선이 데뷔조에 선발돼 반년쯤 준비하던 지난해 9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은 한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함께 데뷔조로 연습했던 외국인 멤버들은 비자 문제로 자국으로 간 뒤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일부 멤버가 빠진 상황에서 연습은 공회전했다. 제일 중요한 군무를 맞춰볼 수가 없었다. 혼자서 연습하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면 홀로 연습만 하던 고등학생 때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밀리고 밀렸던 데뷔가 또다시 늦어지고 있었다.

보컬 수업을 받으러 간 송선이 보컬 트레이너 김제이미에게 말했다.
“저 하기 싫어요. 그냥 음악하고 싶어요. 방송에 안 나와도 되고 그냥 음악하고 싶어요. 싱어송라이터 하고 아이돌 안 해도 돼요.”

‘송선이를 말릴 수는 없겠다’고 제이미는 생각했다. 걸그룹 출신인 그는 송선이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텨왔다는 것을 잘 알았다. 매일 아침 체중계에 찍힌 숫자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고,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을 즐기는 대신 기약 없는 데뷔만 바라보는 생활을 더 견디라고 설득할 수 없었다.

“제가 매니저님한테 애들 차에 태워서 한강 가서 바람만 잠깐 쐬어주면 안 되겠냐, 커피만 마시고 오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안 된다고 했어요. 혹시라도 사진 찍히면 안 되니까. 그걸 몇 년을 했으니….”

숙소에서 나온 송선은 홀로 고속버스를 타고 가족이 사는 평택으로 갔다.
“아무 생각 안 하고 저도 평범한 일상을 한번 살아보고 싶었어요.”

아침―사과 반 개(70Cal), 아몬드 5알(35Cal)
점심―삶은 닭가슴살 120g(200Cal), 현미밥 반 공기(150Cal), 양파버섯볶음(150Cal)
간식―방울토마토 5알(10Cal), 아몬드 5알(35Cal)
저녁―삶은 달걀 2개(155Cal), 두부야채 샐러드(100Cal)

‘데뷔조’ 시절 끼니마다 이런 숫자가 따라붙었다. 살을 빼야 할 멤버와 더 찌워야 할 멤버. 각자가 먹을 열량이 정해져있었다. 매일 아침 인바디 체중계에 올라 체중과 골격근량, 체지방량을 쟀다.

집으로 돌아간 첫날 송선은 치킨을 시켜먹었다. 늦잠을 자고, 가족들과 집밥을 먹고, 친구들과 맛집을 찾아다녔다. 8년 전 연습생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는 누리기 어려웠던 일상이었다.

성공한 아이돌도, 실패한 아이돌도 이런 연습생 시절을 거쳤다. 걸그룹 블랙핑크 멤버들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K팝을 K팝으로 만드는 건 연습생으로 보내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부문에서 회사 기준에 부합해야 돼요.”(제니)

“2주에 하루 쉬고 13일 동안 다시 연습했어요… 앞날도 모른 채 여자애들 몇 명과 날마다 같이 있었던 거죠.”(로제)

블랙핑크가 소속된 YG엔터테인먼트의 대표 프로듀서(PD) 테디는 말했다.

“계속 반복하는 건 어렵죠. 하지만 그렇게 어린 나이에 블랙핑크는 향후 10년간 필요한 모든 기술과 수단을 흡수할 수 있었어요.”(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블랙핑크: 세상을 밝혀라’ )

실력이 데뷔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2020년
10월

소속사 총괄 프로듀서인 신사동호랭이는 송선의 데뷔가 늦어진 것에 대해 “무책임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송선 본인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 운이 없어서였다”고 했다. 그는 2019년에도 송선이 포함된 데뷔조를 준비했다. 앨범 녹음까지 마쳤지만 팀에 장기적으로 투자할 자금이 확보되지 않아 데뷔 직전 결국 접었다.

연습생에게는 당장의 데뷔가 중요하지만 기획사로선 데뷔 이후의 성공이 목표다. 아이돌 그룹을 데뷔시키려면 보통 최소 10억 원이 든다. 데뷔는 시작일 뿐 팬 층을 만들려면 3년은 지속적으로 밀어줘야 한다. 3년 프로젝트에 100억 원 넘게 투자해야 할 수도 있다. 실력과 자본이 완비되지 않은 채로 데뷔했다가 실패하면 ‘패자부활전’은 기대하기 어려운 게 아이돌 바닥이다. 신사동호랭이는 확실한 자금 계획 없이 데뷔시키는 것은 연습생들에게 오히려 잔인한 짓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8년을 기다린 송선에게 지난해 다시 기회가 왔다. 새 걸그룹 ‘트라이비’ 프로젝트에 글로벌 음반·음원 유통사 유니버설 뮤직이 참여해 지속적인 지원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송선은 데뷔조 평가를 거쳐 팀의 메인보컬로 뽑혔다. 송선은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연습에 몰두했지만 데뷔가 미뤄지는 상황을 또다시 견디지 못하고 연습실을 떠났다.

하지만 집에서 쉬는 동안 노래와 춤 말고는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선생님, 저 다시 음악하고 싶어요.”

송선은 제이미에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 숙소를 떠난 지 한 달 만이었다.

이미 메인보컬인 송선의 음색을 고려해 노래를 만들고 녹음도 끝냈던 상황이었다. 송선이 팀을 정신적으로 지탱해 왔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대안을 찾기 쉽지 않았다. 신사동호랭이는 ‘제 발로 떠난 연습생은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송선을 받아줬다.

다시 돌아온 송선은 멤버들과 데뷔곡 ‘둠둠타’를 수없이 연습했다. 아이돌 그룹은 ‘자다가 깨도 무반주에 칼군무가 나올 수 있는 수준’을 목표로 연습한다. 아이돌 세계에서는 무대 위 한두 번의 실수가 ‘실력 없다’는 낙인으로 이어진다.

송선은 올 2월 7인조 걸그룹 ‘트라이비’ 데뷔 쇼케이스를 며칠 앞두고서야 데뷔를 실감했다.

“쇼케이스 대본을 받았을 때에야 데뷔한다는 느낌이 조금 왔던 것 같아요. 그전에는 항상 멤버가 바뀔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두고 있으니까…. 너무 많이 그랬어가지고. 확정이 됐는데도 ‘설마 진짜인가’하면서 잘 와 닿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미 완성된 자들의 경쟁이 시작된다

2021년
​5월

트라이비는 5월 18일 두 번째 싱글 앨범을 들고 서울 광진구 ‘yes24 라이브홀’에서 다시 쇼케이스 무대에 섰다.

온라인으로 진행된 이날 행사의 유일한 현장 관객은 멤버들의 가족이었다. 송선의 어머니는 캄캄한 2층 관중석에서 무대를 보면서도 한 손으로는 스마트폰에서 생중계되는 쇼케이스 영상에 셀 수 없이 많은 하트를 누르고 있었다.

이날 기자와 만난 송선의 어머니는 딸에 대해 말을 아꼈다. 딸이 이제 막 데뷔했는데 자신의 인터뷰가 딸에게 조금이라도 폐가 되지 않을지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송선처럼 10대 시절의 열정을 바쳐 데뷔했던 아이돌 스타 자녀(‘비스트’ ‘하이라이트’ 손동운)를 둔 손일락 청주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애들 활동할 때보다 지금 군무가 더 격해져서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그동안에도 어마어마하게 진화했구나. 데뷔 전에 보니까 (다른 멤버) 기광이는 나이키 신발 열 켤레가 밑창이 없더라고요. 발바닥에 족문도 없었어요. 그만큼 비벼가면서 춤을 췄다는 거예요.”

“하루는 우리 애가 연습하고 집에 왔는데 씻지도 못 하고 쓰러져 자요. 양말을 벗겼는데 발이 피투성이인 거예요. 제가 처음으로 애 잘 때 마사지를 해줬어요. 그러면서 ‘됐다, 이 정도 노력했으니까 안 떠도 된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송선은 모든 아이돌 지망생이 원하지만, 그 자체로 바늘구멍인 데뷔의 문턱을 넘었다. 그렇게 연습생 신분을 벗어나는데 9년이 걸렸다. 하지만 트라이비는 이제 막 싱글 2집 활동을 마친 여러 신인 걸그룹 중 하나일 뿐이다.

수많은 아이돌이 이렇게 ‘완성된’ 모습으로 데뷔한다. 이들 사이에서 누가 더 완벽한 매력을 발산하느냐를 두고 이제 완전히 새로운 경쟁이 시작된다.

발간일 2021년 7월 20일

  • 기사 취재|위은지 김도형 김배중 임보미 기자
  • 사진 취재|송은석 기자
  • 그래픽|김충민 기자
  • 프로젝트 기획|이샘물 이지훈 기자
  • 사이트 제작|디자인 이현정, 퍼블리싱 조동진 김하나, 개발 최경선 박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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