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 - 첫 번째 이야기 내 동생 현승이

환생 - 첫 번째 이야기 (1)이별

그때는 몰랐다. 그 전화를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게 될 줄은.

평범한 금요일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오전 8시. 평소처럼 경남 양산부산대병원으로 출근했다. 교수연구동 5층 연구실에 도착한 뒤 갈색 가방과 감색 외투를 걸어두고 하얀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10월의 끝자락이었다. 창밖엔 단풍잎들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오전에 잡혀있던 수술은 한 건. 순조롭게 마무리했다. 오후엔 회진이 있었다. 며칠 전 흉벽 기형 수술을 받은 아이를 보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때였다. 전화가 울린 건.
외래 데스크 번호가 스마트폰에 떴다.

“네, 손봉수입니다.”
“교수님, 지금 외래 쪽에 전화가 왔는데요. 동생분이 다치셨다고 연락이 와서요.”
“제 동생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전화가 계속 오고 있어요. 아무래도 직접 통화해보셔야 할 것 같아요.”

피식 헛웃음이 났다. 요즘 보이스피싱은 정말 대단하구나. 이젠 병원으로까지 전화가 걸려오나. 일단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뉴스에서 봤던 대로 침착하게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승아, 지금 보이스피싱이 왔는데 뭐라 카는지 아나.”

방금 전 일을 웃으며 얘기하리라.

전화를 받은 건 동생이 아닌 다른 목소리였다.

“저, 현승 씨랑 같이 일하는 사람인데요. 현승 씨가 너무 다쳐서 의식이 없어요. 여기 해운대백병원 응급실이에요.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아요.”

그 다음부턴 기억이 확실치 않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장면과 장면. 정신없이 달려갔고, 미친 듯이 전화를 걸었다.

“저 흉부외과 손봉수인데요. 해운대백병원 신경외과에 아는 선생님 계세요?”

“해운대백병원 흉부외과죠? 양산부산대 흉부외과 손봉수입니다. 제 동생이 다쳐서 그쪽 응급실에 있다는데, 담당 신경외과 교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봐주실 수 있어요?”

잠시 후 다시 걸려온 전화. 믿기지가 않았다. 항상 듣던 단어인데도 너무나 생경한. 코마, 두개골 골절, 지주막하 출혈, 뇌부종…. 멍하니 전화기를 든 채 응급실 입구에 다다랐다.

‘손현승, M(남성), 39y(39세).’

동생이 누운 철제 침대에 걸린 카드 속 이름이 낯설었다.
“혈압이 안 잡혀요!” 의료진들의 날카로운 외침. 내 동생, 현승이는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엉망으로 부어버린 얼굴. 머리를 감은 붕대는 온통 검붉었다. 나를 알아본 신경외과 교수는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 두개골 하부가 골절돼 지혈이 안 돼요. 혈관이 완전히 망가져서 출혈 지점을 찾는 게 어려울 정도예요. 뇌부종도 너무 심해요.”

터질 듯 부어오른 뇌의 압력이 너무 높았다. 경동맥 위, 현승이의 머리 쪽은 피가 전혀 통하지 않고 있었다. 순간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단어.

‘뇌사(腦死).’

설마, 설마. 아닐 거야.

의료진이 지혈을 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현승이에게 쓸 수 있는 수혈제제들은 바닥나 갔다. 상대적으로 수혈제제가 많이 확보된 부산대병원 외상센터로 빨리 옮겨야 했다.
그날 밤, 눈물범벅이 된 채로 동생을 앰뷸런스에 태웠다. 현승이 입과 코에 연결된 수동식 인공호흡기를 쥐어짜며 외상센터로 달렸다.

두 살 터울인 하나뿐인 동생. 현승이는 부모님께 딸 같은 아들이었다. 집안 살림은 넉넉지 않았다.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우리 둘을 앉혀 놓고 “공무원이 되라”고 하셨다.
악바리처럼 공부했다. 기어코 흉부외과 의사가 됐다.
유순한 성품의 현승이는 달랐다. 공부보단 음악과 소설, 영화를 좋아했다. 늦깎이로 작은 현수막 제작업체에 들어갔다.

난 장남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막상 집에선 언제나 ‘부재중’인 존재였다. 학생 땐 공부한다고, 재수 때는 기숙학원에 지낸다고. 의대에 가선 수련, 의사가 된 뒤론 수술과 외래진료. 큰아들은 집에 없었다.

현승이는 그런 형을 대신해 묵묵히 대소사를 챙겼다. 홀로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 현승이는 밥이며 빨래며 뭐든 알아서 했다. 속 깊은 둘째 아들이었다.

내가 가정을 꾸린 뒤에도 현승이는 한결같았다. 맞벌이인 우리 부부를 대신해 부모님과 함께 조카들을 돌봤다. 동생의 휴대전화는 조카 사진으로 가득했다. 제 자식처럼 어르고 씻기고 먹이고 재웠다.

늦은 밤 퇴근해 아이들을 데리러 가면 잠든 아이를 업고 내려온 것도 현승이였다. “자는 아를 뭐할라꼬 데꼬 가노. 기냥 두고 가지.”

동생은 회사에서 디자인을 한다고 했다. 단 한번도 현승이가 위험한 일을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취직한 동생이 아침에 현관에서 신발을 신을 때마다 어머니는 등을 두드렸다. “우리 아들! 잘 될 끼데이!” 어머니의 함박웃음. 현승이는 씩하고 쑥스럽게 미소지었다. “어무이, 다녀올께예.”

동생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사고 뒤에야 알았다. 중소 규모의 현수막 업체들은 제작만 해선 보수가 변변치 않다. 설치까지 해줘야 일종의 수고비를 받는 모양이었다.

사고가 벌어진 그날, 동생은 롯데 시그니엘 부산 호텔의 4층 연회장에 가로 7m짜리 현수막을 걸러나갔다.

“호텔에 가니까, 직원이 ‘저기 3층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리프트 쓰시면 돼요’ 하고는 가뿌리는 기라예. 우째 쓰라는 설명도 없고. 테이블 땜에 안전장비 세울 데도 없는데 우짜라는 말도 없고. 그래도 우짭니꺼. 일감 받고 갔는데 일은 해야 안 되겠능교.”

함께 나갔던 동료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은 언제나 그랬다. 불평 없이 묵묵히 일하는 아이. 그날도 현승이는 안전모 하나 제공받지 못한 채 말 없이 위태롭게 세워진 리프트 위로 올라갔다. 어렵사리 일이 끝났다 싶었던 순간.

기우뚱하며 쓰러진 6m 높이의 리프트에서 머리부터 바닥으로 떨어졌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아들을 보며 어머니는 가슴을 치고 또 쳤다. 아들과 열 발짝쯤 떨어진 보호자대기실의 차가운 바닥에 의료품 상자를 깔고 누워 밤을 지새웠다. 외상센터 중환자실 면회는 하루 한 시간. 딱 1명에게만 주어졌다.

“이기 무슨 엄마라꼬…. 자식새끼 뭔 일을 하는지도 모리고, 아침마다 ‘잘 될 거야’라 캤으니. 현승이가 한번도 힘들다 칸 적이 없는데, 힘들다 말이라도 했으면. 인자 우짤꼬….”

하나둘씩 소식을 듣고 도착한 집안 어른들. 여기 있다가 큰일 난다고 말렸지만 아무도 어머니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게 시멘트 바닥에서 지샌 밤들.
오전 10시 반 면회시간만 되면 어머니는 넋 나간 이처럼 중환자실로 뛰어갔다.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푸른빛 호스들이 달린 동생의 손. 어머니는 그 손을 부여잡고 얼굴을 비볐다. 발을 주무르며 통곡했다. 현승이가 좋아하는 미국 팝가수 록웰. 어머니는 휴대전화에서 노래를 찾아 동생 귀에 대줬다. 혹시나 들을지 모른다며. 하지만 현승이 얼굴은 고요했다. 어떤 미동도 없었다.

24시간 넘도록 피가 통하지 못한 뇌. 컴퓨터단층촬영(CT) 화면에서 현승이 머릿속은 새카맸다. 하얗게 보여야 할 뇌실도, 주름도 없었다. 그저 암흑뿐인 공간.
나는 알고 있었다. 현승이는, 하나뿐인 내 동생은 뇌사였다

뇌사는 식물인간과 다르다.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혼용해 쓰는 탓에 오해가 많다. 식물인간은 대뇌피질 손상으로 의식을 잃었을 뿐이다. 호흡이나 소화, 심박을 담당하는 뇌의 중심은 살아있다. 식물인간이던 환자가 기적처럼 깨어나는 일은 실제로 있다.
하지만 뇌사는 아니다. 뇌의 모든 부분이 완전히 죽은 상태다. 불수의근(의식으로 조절할 수 없는 근육)인 심장만 뛰고 있다.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다. 인공호흡기가 없으면 호흡도 할 수 없다. 회복될 가능성 또한 제로다.

뇌사 상태에선 두 가지 선택지가 앞에 놓인다. 하나는 그 상태로 짧으면 일주일, 길면 3주. 서서히 심장을 비롯한 장기가 꺼져가는 걸 지켜보다 이별을 맞는 것. 다른 하나는 뇌는 죽었지만 아직 살아있는 장기로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 장기기증이다.

나는 명색이 흉부외과 의사이자 폐 이식 전문의였다. 전국 곳곳에서 이식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식을 받지 못해 생을 마감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도.

의대 동기인 외상센터 신경외과 이정환 교수를 만났다.

“정환아, 내 동생… 되겠나. 안 되겠제.”
“…아무래도, 힘들 거 같다.”
“그렇제? 브레인데스(brain death·뇌사) 같제···.”

잠깐 숨을 골랐다. 어딘가 먼 곳을 쳐다봤는지도 모르겠다.
“정환아, 니가 내 동생… 뇌파 검사 좀 해줄래.”
“…알겠다.”

그게 뭘 뜻하는지 서로가 알고 있었다. 현승이가 다신 눈을 뜨지 못한다는 걸. 장기기증을 위해 필요한 절차를 진행해 달라는 뜻이라는 걸.

뇌사 추정 환자가 장기기증을 하려면 절차를 밟아야 한다. 1, 2차 뇌파 검사에서 아무 반응이 없음을 확인한다.
뇌사판정위원회가 열리고 뇌사를 인정받는다. 그 순간, 환자의 심장이 뛰고 있어도 법적으론 사망으로 선고된다.

하지만, 그날 다시 이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뇌파 검사, 조금만 기다려도.” 사고 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빨리 동생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의사로선 알고 있었다. 회복 불가가 명백했다. 하지만 형이기도 했다. 기적이 일어나길. 도저히 마지막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현승이는 갈수록 멀어져갔다. 하루, 한시가 달랐다. 꺼져가는 몸속에선 균이 번식해 폐렴까지 왔다. 폐렴균을 잡으려 독성이 심한 항생제를 썼다. 신장과 간 기능이 떨어져 온몸이 부어올랐다. 이대로는 욕창이 생길 수도 있었다. 결정의 순간은 미뤄지질 않았다.

“아부지···. 우리 현승이 장기기증하면 어떻겠습니까. 일부나마 어딘가에서 살아가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평생 조선소 밥을 먹은 아버지. 대형 크레인이 얽히고설킨 곳에서 살아온 당신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도 추락사고 당한 사람 중에 옳게 돌아온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니도 의사고 하니···. 다른 사람 살리는 게 맞겠제?”

어머니는 펄펄 뛰었다.

“일주일도 안됐는데 무슨 소리고? 이래 혈색 있고 가슴도 오르락내리락하는데. 내 아들 멀쩡히 살아있는데 무슨 소리고?”

하지만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갈수록 변해가는 현승이의 모습. 어머니도 점점 무너져갔다. 이제는 보내줘야 했다. 하지만 결정을 한 뒤에도 어머니는 자꾸만 자꾸만 되물었다.

“봉수야, 니 동생 좀만 더 있다 가면 안 되나. 인공 뇌가 있다 안 했나. 인공 뇌가 있다 카든데···. 이리 보내면 이제 사진밖에 못 보는데···.”

11월 11일. 사고 발생 열흘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새 차가워진 바람에 나뭇잎들도 어느덧 거의 남질 않았다.
흰 가운 위에 푸른색 비닐 방역복을 입은 의료진이 중환자실로 들어와 뇌사 판정 검사를 시작했다. 동생의 눈에 붙어있던 거즈를 뗐다. 양쪽 눈꺼풀을 차례로 벌려 동공에 작은 불빛을 비췄다. 활짝 열린 눈동자. 불빛에도 반응이 없었다.

다음으로 귀 쪽에 가느다란 관을 갖다대고 차가운 물을 쏘았다. 뇌파 역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6가지 검사 뒤에도 여전히 일직선이던 뇌파는 그대로 30분 째 움직이질 않았다.

차트에 ‘뇌사 확인’이란 네 글자가 적혔다.

그새 폐와 간, 췌장은 상태가 나빠졌다. 현승이는 심장과 두 개의 신장을 기증하기로 했다. 각막은 가능했지만 제외했다. “우리 현승이가 나중에 날 못 알아보면 우짜노.” 어머니의 반대였다. 장기기증을 위한 적출 수술 시간이 다음날 오후 5시로 잡혔다.

수술 직전, 가족에겐 잠깐의 시간이 주어진다. 떠나는 이를 마지막으로 만나는 순간.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현승이에게 다가갔다.

“현승아, 현승아… 얼른 신발 신고 가자. 엄마 눈물 좀 닦아도… 엄마는 못 견딜 것 같다. 현승아, 엄마 데리러 온나. 엄마 데리러 온나···.”

어머니는 오열했다. 아무 말 없던 아버지의 두 눈에선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침대시트로 번져갔다. 아들의 발을 어루만지고 반쯤 뜬 눈을 감겨준 건 아버지였다.

“…너무 빨리 갔다. 우짜면 좋노.”

한참동안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 현승아. 마음속으로 수천 번을 되새김질했다. 형이 미안하다. 못해준 게 너무 많다. 지금도 현승이를 생각하면 미안하고 미안하다.

오후 4시 10분.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동생이 중환자실 침대에서 이동식 베드로 옮겨졌다. 중환자실 유리문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수술실이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엘리베이터에서 수술팀이 베드를 밀고 나오자, 멍하니 주저앉아있던 어머니는 불에 덴 듯 벌떡 일어났다. “안 된다, 안 된다!” 베드를 붙잡은 어머니는 필사적이었다. 아버지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잠시 뒤 현승이는 수술실 안으로 사라졌다.

사정없이 닫혀가는 문. 그 앞에 망연히 서서야 깨달았다. 흉부외과 의사로 일한 지 15년. 폐 이식 수술만 100건이 넘었건만, 한번도 수술실 밖은 떠올리지 않았다는 걸. 그곳에 멈춰있는 가족들은 생각하지 못했다는 걸.

물론 의사는 수술대 앞에 환자에 집중해야 한다. 언제나 머릿속엔 ‘적출한 폐가 손상되기 전에 1분 1초라도 빨리 움직여 환자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수술대 위에 있던 그들 모두도 바로 문 밖엔 언제나 가족이 있었다. 울컥 가슴이 저려왔다.

현승이의 장기 적출 수술을 진행하는 의료진에는 같은 병원 동료들도 여럿이었다. 그들이 수술실 진행상황을 메신저로 알려줬다.

‘봉수야. 심장에 보존액 들어갔다. 6시 27분이다.’

심장 기증을 하려면, 혈관을 닫고 심장을 멈추는 보존액을 넣어야 한다. 현승이의 법적 사망시간은 11월 12일 오전 9시 3분. 뇌사판정위원회에서 뇌사를 선고받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동료들이 알려준 건, 진짜 현승이의 심장이 멈춘 시간이었다. 동생이 이 세상을 완전히 떠난 시간.

현승이의 심장은 이제 평생을 머물던 몸을 빠져나간다. 다른 이의 품으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

  • 기사 취재|곽도영 이윤태 김동혁 김은지 기자
  • 사진·동영상 취재|곽도영 이윤태 장승윤 양회성 기자
  • 동영상 편집|김신애 안채원 CD 이샘물 기자
  • 그래픽|김충민 기자
  • 프로젝트 기획|이샘물 김성규 기자
  • 사이트 제작|디자인 이현정, 퍼블리싱 조동진 김수영, 개발 윤태영
  • 총괄팀장|임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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