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 - 네 번째 이야기 생을 잇는다는 건

첫인사를 건네기가 이렇게 어려운 직업이 또 있을까.
이제는 좀 나아질 법도 하련만.
오늘도 선뜻 다가갈 수 없는 안타까움에 몇 번이나 작게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해선 안 된다. 이제 용기를 내 말해야 한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KODA·코다)에서 나온 주용호라고 합니다.”

퉁퉁 부어 발개진 눈, 한 손에 흠뻑 젖은 휴지를 꼭 쥔 노년 여성이 당신은 누구냐는 표정으로 낯선 나를 바라본다.

이제부터 나는 슬픔에 잠긴 어르신께 설명할 것이다.

아드님의 생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같다고, 하지만 장기는 아직 살아있다고, 그 장기로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혹시 죽어가는 다른 이를 위해 아드님의 일부를 전해주실 수 있으시냐고.

차마 하기 힘든 말이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야 떠나가는 이도, 기다리는 이도, 모두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하는 일··· 여전히 어려운 첫 인사

“코디(코디네이터)가 된 지 10년이 다 돼가지만 여전히 보호자들께 첫인사 드릴 때가 가장 힘들어요.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을 할 수가 없더라고요. 안녕하실 리가 없잖아요···.” 주용호 씨(38)가 말했다. 수많은 고민 끝에 생각해낸 첫인사는 ‘인사드리겠습니다’가 됐다.

용호 씨는 KODA에 소속된 장기 기증 담당 코디네이터다.

보건복지부 산하인 KODA는 국내에서 발생하는 뇌사자의 장기 구득을 담당하는 공공기관이다. 한국은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에 따라 각 병원이 뇌사로 추정되는 환자가 발생하면 이를 KODA에 통보한다. 연락을 받고 해당 병원으로 출동하는 게 그의 일이다.

현장에 도착한 코디네이터들은 뇌사 추정자의 보호자에게 장기 기증에 대해 안내한 뒤 동의 의사를 확인한다. 보호자가 기증에 동의할 경우엔, 뇌사 확인 검사부터 수술까지 장기 기증의 전체 과정을 조율하는 일도 맡는다.
용호 씨는 원래 간호사였다. 코디네이터는 간호사 중에서도 최소 3년 이상 중환자실, 응급실, 수술실 등에서 다수의 중환자를 경험한 베테랑만이 될 수 있다. 그만큼 민감하고 어려운 일이란 뜻이다.

“응급실에서 일했었는데 매일 죽음을 마주했어요. 어찌 손써볼 새도 없이 세상을 떠나는 환자들을 보며 너무 괴로웠죠. 더 이상 여기 있기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2012년, 그는 KODA로 자리를 옮겼다.

“코디네이터가 되고 처음 신입 교육을 받았던 여름이 아직도 기억나요. 제주한라병원에서 뇌사자가 발생했는데 보호자가 기증에 동의해주셨죠. 처음으로 기증과 이식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는데 정말··· 대단했어요. 기증자 심장을 이송하기 위한 헬기가 서울에서 날아오고, 항공사에 이 장기도 하나의 생명이라고, 자리를 내어달라고 요청하고요. 비행기가 급유할 동안 앰뷸런스로 공항까지 달리고···.”

떠나간 이의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잇기 위한 의료진의 분투도 잊지 못한다.

“여러 장기를 적출하다 보니 수술실엔 여러 병원에서 온 의료진이 모이죠. 서로가 각 팀을 배려하며 모든 장기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아, 이렇게 마음을 모아야 할 수 있는 좋은 일이구나’ 싶었어요.”

용호 씨는 “응급실에서 지켜봤던 많은 죽음들이 어찌 손써볼 새도 없었던 허무한 죽음들이었다면 그곳에서 본 죽음은 전혀 다른,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죽음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자 모든 과정이 쉽지 않았다. 처음 뇌사자 보호자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가 혼쭐이 났다. 보호자가 “어떻게 나한테 안녕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냐”며 불같이 화를 냈던 것.

“다행히 뇌사 조사가 끝났다”고 말했다가 “뇌사가 확정된 게 다행이란 말이냐”고 삿대질을 당하기도 했다. ‘장기기증’이란 말에 “내 가족을 어떻게 하려고 왔냐”며 보호자들이 멱살을 잡은 적도 있었다.

밤낮없이 대기하며 밤을 하얗게 지새워야 하는 것도 일을 시작하고서야 알았다. 코디네이터들은 1년 365일 24시간 ‘온콜(on-call·비상대기)’ 상태다. 뇌사자는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장기기증은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죽음···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영화관에서 뛰쳐나가고 샤워하다가도 나가고 하는 건 흔한 일이죠.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이니까요. 일분일초가 흐를수록 장기 상태는 악화되고 기증은 어려워져요.”

용호 씨는 지난해 어머니의 기일도 챙기지 못했다. 2019년 돌아가신 뒤 찾아온 첫 기일이라 연차까지 냈지만, 당일 아침 걸려온 콜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렇게 일하는 KODA 소속 코디네이터들은 전국에 76명이다.
하지만 진짜 어려움은 그런 게 아니다. 시간이 가도 나아지지 않는 장기 기증에 대한 사회적 신뢰와 이해도. 현장에서 매일매일 느끼는 가장 높은 벽이다.

“일부 영화나 드라마가 만든 이미지가 정말 큰 것 같아요. 상담을 하면 ‘기증해봤자 병원만 좋은 일 시키는 것 아니냐’, ‘부자들한테만 장기가 가지 않냐’고 하는 분들이 적지 않아요. 뇌사자의 장기가 악화돼 기증이 실패로 돌아가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장기를 어디로 빼돌렸느냐’며 의심하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용호 씨는 단호했다. 한 번도 이 일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일하는 과정이 아무리 어려워도 한 건의 기증이 이뤄질 때마다 얻는 ‘환생의 감동’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잘못된 사회적 오해를 걷어내면 ‘환생의 감동’이 보여요

“그 보람은 말로 못 해요. 물론 제가 누군가를 살린 건 아니죠. 기증자분이 숭고한 희생으로 생명을 살린 거예요. 하지만 그걸 지켜보는 뿌듯함이 있어요.”

때론 평생 잊지 못할 ‘인생의 울림’도 얻는다.
“제주도에서 아들을 보내셨던 아버님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첫째를 교통사고로 이미 잃으신 분인데, 둘째마저 사고로 뇌사에 빠졌거든요. 그런데 그분이 ‘내 아들은 효자다. 첫째는 기회도 없었는데, 둘째는 아빠 맘 아프지 말라고 손도 잡아보고 온기도 느껴볼 수 있게 해줬다. 그리고 이렇게 기증까지 해 생명을 남겨주고 떠났다’고 하시더라고요. 정말 존경스럽고 위대한 분들이에요.”
코디네이터들은 매일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뇌사자에게 장기 기증의 기회를 알리기 위해 전국을 돈다.

하지만 작년과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뇌사자 확인도, 보호자 면담도 쉽지 않다. 교육이나 구득 활동이 줄어들면 그만큼 장기 기증은 위축된다. 새 삶을 기다리다 세상을 뜨는 이식대기자들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코디네이터들이 나서기 힘든 이런 시국일수록 현장에 있는 의료진이 장기 기증을 위해 노력해주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많은 의료진에게 아직까지 장기 기증은 ‘환자 보호자에게 차마 못 할 얘기를 해야 하는 곤란한 일’이거나 ‘굳이 의사가 해야 할 필요 없는 가욋일’처럼 느껴지는 게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재명 고려대안암병원 중환자외과 교수(43·여)는 꽤나 별난 의사로 통한다.

그는 적극적인 장기 기증 확산활동으로 생명 나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보건복지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지난해 고려대안암병원에서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20명의 뇌사자가 기증을 선택한데도 그의 공이 컸다.

뇌사자의 장기 기증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봉사

“제가 원래 전공이 간과 쓸개, 췌장 이식이었어요. 일을 하며 이식이란 게 얼마나 기적적으로 죽음의 문턱에 있는 이들을 살리는지 절감했죠. 그런데 결국 이식은 기증이 있어야 가능하거든요. 뇌사자의 장기 기증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봉사입니다.”
때로 이 교수는 기증을 선택한 환자들의 ‘뇌사 관리’를 위해 새벽녘까지 환자의 곁을 지킨다. 뇌사자가 기증으로 가는 순간까지 신체 컨디션을 유지하려면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액을 통해 영양을 공급하거나 장기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호르몬제를 투약하는 것, 몸속에 세균이 번식하지 않도록 세심히 관리하는 것 등은 모두 의료진의 특별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지난해 11월 18일, 새벽 동이 트기도 전인 오전 5시에도 이 교수는 고려대안암병원 중환자실에 있었다. 급성 뇌출혈로 입원한 뒤 줄곧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던 임모 환자(67)의 가족들이 며칠간의 고민 끝에 전날 자정경 기증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뇌사로 진행될 게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도 가족들은 끝까지 연명치료를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자 결국 남을 살리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날 오전 임 씨의 팔다리는 물론 몸 곳곳에 보랏빛 반점들이 멍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골든타임이 지나 혈액을 타고 세균이 폐와 간으로 번진 탓이다.

“이렇게 되면 기증을 할 수 없어요. 뇌부종(뇌에 물이 차고 부풀어 오르는 증상)이 오거나 몸에 세균이 퍼지면 돌이킬 수 없거든요. 기증 동의가 이틀 전에만 이뤄졌어도 다른 생명을 살리고 떠나실 수 있었을 텐데···.”

이 교수는 “보호자들로부터 기증 동의를 얻는 게 코디네이터 선생님들의 역할이라면, 그 뜻이 잘 실현될 수 있게 환자의 장기 상태를 최적으로 관리하는 건 제 역할”이라고 말했다.

“가끔 보호자들께서 ‘눈을 기증하면 저승 가서 무슨 수로 알아보냐’, ‘장기를 기증하면 고통스럽지 않겠느냐’며 걱정하세요. 그럴 때마다 전 제가 할 수만 있다면 저세상에 한번 다녀와 보고 싶어요. 장기 기증을 하신 분들이야말로 누구보다 행복하게 천국에서 복을 누리고 계실 거라고 저는 믿거든요.”

발간일 2021년 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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