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나라에서는 4만3182명(2020년 말 기준)의 환자들이 이 정거장에 서 있다.

이들이 기다리는 ‘환생’이라는 버스는 오직 장기 기증인만이 몰 수 있다. 한 명의 기증인은 최대 9개, 평균 3.58개의 장기를 선물한다.

그러나 이 버스는 가끔, 아주 가끔씩만 온다.

매년 전체 사망자 가운데 장기 기증이 가능한, 뇌사 상태에 빠지는 이는 불과 1%. 이 1% 가운데 장기 기증에 동의하는 이는 4명 중 1명꼴이다.

지난 한 해 숨진 30여만 명 가운데 오직 478명만이 이 정거장에 들러 사람들을 살리고 떠났다.
오늘도 정거장에 선 이들은 어쩌면 평생 만나지 못할지도 모를 버스를 초조하게 기다린다.

이식을 바라는 환자들의 평균 대기시간은 3.36년. 매일 6명의 사람들이 기다리다 지쳐 이 정거장에서 세상을 떠난다.

기약 없는 희망. 하지만 오늘도 이들은 버스를 기다린다.​

환생-세 번째 이야기 마지막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여느 주부처럼, 김경란 씨(49)는 거실과 부엌 사이를 가로막고 선 장판 위 빨래건조대가 눈에 거슬린다. 건조대에는 비쩍 말라 걷을 때가 한참 지난 색색의 옷가지가 뻣뻣하게 매달려 있다.

경란 씨는 생각한다. ‘빨래는 걷어내서 개고, 종류별로 쌓아서 옷장에 넣고···. 건조대는 접어서 딸들이 쓰는 방문 옆에 세워두면 좋겠는데···.’ 하지만 늘 그렇듯 오늘도 이런 일상은 머릿속 상상으로 끝날 뿐이다.

거실 바닥에 앉은 경란 씨와 빨래건조대 사이의 거리는 겨우 2m. 그 짧은 거리를 가지 못하게 옭아매는 건 경란 씨의 바로 옆에 있는 하얀 기계다. 마치 정수기처럼 생긴 높이 60cm의 이 기계 이름은 가정용 산소발생기. 기계와 이어진 가느다란 투명 호스는 경란 씨의 양쪽 콧구멍에 연결돼 있다. 거친 숨이나마 경란 씨가 숨쉬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생명 줄이다.
“집을 치우려면··· 기계를 같이 옮기며 움직여야 하는데···. 이게 15kg이나 되거든요···. 제가··· 혼자 서너 걸음 걷는 것도 잘 못하다 보니까···.”

말끝마다 숨을 골라야 했던 경란 씨는 “청소는커녕 화장실도 서너 걸음이 힘에 부쳐 볼일을 미루는 신세”라며 씁쓸히 웃었다.​
경란 씨는 하루 종일 약 4평(13.2㎡) 남짓한 거실에서 머문다. 산소발생기가 올려진 창가 앞 낮은 수납장 옆이 그의 고정석이다.

“호스를 꽂고··· 여기 좌식용 의자에 붙박이처럼 앉아 있어요···. 애들한테도 그랬지요. 엄마는 여기 있지만··· 그냥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라고···.”
모든 집안일을 엄마 없이 해야 하는 두 딸과 아들, 그리고 남편. 가족을 바라보는 경란 씨의 맘은 착잡하기만 하다.

“혼자 샤워도 할 수 없어 딸들이 씻겨주는 신세죠. 현관 벨이 울려도 문을 못 여니 중학생 아들을 찾고···. 참 미안하고 비참하고 그렇죠. 아이들에게 내가 짐이 되진 않나···.”

경란 씨는 막내의 초등학교 학부모 행사조차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옛일을 회상하던 그의 눈가가 어느새 발개졌다. 저녁이 다 되도록 잠옷도 갈아입지 못한, 엄마 경란 씨는 그렇게 앉아 있었다.
경란 씨 집은 서울 도봉구 시장 골목에 있다. 남편이 운영하는 멸치국수 가게 위 2층이 그의 집이다. 몇 년 전까지 그 가게는 부부가 함께 16년 동안 운영해 온 조개구이 가게였다. 하지만 경란 씨가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자 남편 혼자 할 수 있는 국수 가게로 바꿨다.

“아프기 전엔 엄청 건강했어요. 5년 동안 하루도 안 빼고 가게 문을 열 정도였는데···.”
처음엔 감기 몸살인 줄 알았다. 2016년 2월,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이상하게 숨이 찼다. 동네 병원에서 천식 진단을 받고 약을 지어 먹었는데도 좀처럼 낫질 않았다. 온몸에 고름이라도 찬 듯 아프기 시작했다.

큰 병원에 갔더니 처음엔 일종의 류머티스 질환이라고 했다. 3개월 넘게 입원 치료를 받았는데, 이번엔 폐가 망가지기 시작했다. 폐세포가 딱딱해지는 폐섬유증이 급속히 진행됐다. 2018년 12월, 의사는 최후통첩 같은 말을 했다. 폐 이식을 받아야 한다고.

“처음엔 싫다고 했어요. 수술도 무섭고···, 비용도 7000만~8000만 원이나 된다는데···. 보험이 돼도 수천만 원을 써야 하는데···. 싫다고, 안 한다고 했어요.”

월세를 내며 운영하는 경란 씨네 가게 국수 가격은 멸치국수 3500원, 비빔국수 4000원이다.


돈 걱정, 수술 걱정에 그냥 포기하겠다고 말하는 그에게 주치의인 백효채 세브란스병원 흉부외과 교수는 짐짓 호통을 쳤다.

“엄마가 그렇게 약해지면 되겠어요? 아이가 셋이면 더더욱 살아야지!”

눈물을 쏟는 경란 씨를 백 교수는 위로하며 응원했다. 백 교수는 “과거와 달리 지금은 이식수술 성공률이 90%가 넘는다”며 “이식 뒤에 5년 이상 생존할 확률도 62% 이상”이라고 말했다.
어렵사리 마음을 다잡았지만 기회는 쉽게 오질 않았다. 가장 긴급하다는 1순위 대기자에 이름을 올린 지 2년이 다 돼가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지난해 말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크리스마스 사흘 전인 22일, 병원으로부터 기증자가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얼떨떨하면서도 부푼 기대로 입원 준비를 했다. 가족과 부모, 형제들에게도 기쁜 소식을 알렸다.

그런데 2시간 만에 다시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정말 죄송한데 수술 뒤에 들어갈 중환자실 병실(무균병상)에 자리가 없어서 이식수술을 못 하게 됐어요.” 믿기 어렵지만, 중환자 병상이 태부족인 의료계에서는 이런 일도 종종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결국 기회는 다른 병원에 있는 경란 씨 다음 순위 대기자에게 넘어갔다. 가족들은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오열하듯 분노했다. 하지만 경란 씨는 화를 낼 기운조차 남아 있질 않았다.

다시 시작된 기다림. 오늘도 그의 몸은 갈수록 망가지고 있다. 당뇨에 고혈압, 간 질환, 대상포진까지···. 온갖 합병증으로 하루에 먹는 약만 40알에 이른다.
경란 씨는 요즘 ‘이후’를 생각한다. 엄마도 없이 수험생 시기를 버틴 두 딸···. “엄마는 내가 지켜줄게”라며 임상병리학과에 진학한 속 깊은 효녀들이다. 그런 아이들이 앞으로 결혼도 출산도 엄마 없이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언니한테 몰래 부탁했어요. 혹시 내가 잘못되면, 우리 딸들 결혼할 때 언니가 꼭 엄마 역할 해달라고. 옷도 혼수도 제일 좋은 걸로 해달라고요···.”

경란 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맘이 갈팡질팡한다”며 “희망이 생겼다가 절망이 찾아오고 그냥 이렇게 기다리다 죽는 건가 싶을 때도 있다”며 눈물을 훔쳤다.

“살고 싶죠. 너무너무 살고 싶어요. 아이들 떠올리면 어떻게든 살고 싶어요. 지금 이 상태라도 좋으니. 호스를 꽂고서라도 살기만 하면 좋겠어요.”
국내 폐 이식 분야 권위자로 손꼽히는 백 교수는 “폐는 다른 장기보다 이식이 까다롭지만, 요즘은 기증만 받을 수 있으면 ‘수술 끝나면 집에 가신다’고 환자들에게 말할 정도로 성공률이 높다”고 말했다.

“이식받은 환자들과 함께하는 산행 모임이 있어요. 해마다 4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산에 갑니다. 등산을 하다가 환자들이 300~400m쯤 올라가 갑자기 주저앉아 울곤 해요. ‘내가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느냐’며. 다 같이 부둥켜안고 울어요.”

그는 “장기 기증이란 그런 것”이라며 “누구도 고칠 수 없는 환자들을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주는 기적”이라고 말했다.

“7주 동안 에크모(ECMO·인공심폐기)를 달고 누워 있던 아홉 살 꼬마가 이식수술 뒤 회진에서 만나면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고 있어요. 그런 모습을 볼 때 ‘야, 이게 참 기증의 힘이다’ 그렇게 느끼죠.”

그 기적이 나에게도 오기를.
장기 기증을 기다리는 정거장에 선 4만3182명의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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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간 이식을 기다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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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신장을 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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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일 2021년 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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