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임스네이션은 어떤 곳인가
김용현(44)은 2016년 초부터 수도권 전역에서 신축 빌라를 대거 사들이기 시작했다. 2017년 3월에는 부동산 매매 및 컨설팅 법인 ‘제임스네이션’을 세우고 본격적인 빌라 매입에 나섰다.
자금이 부족한 김용현은 주택 매매가와 전세가 차이가 적은 신축 빌라를 노려 이른바 ‘무자본 갭투자’를 했다. 신축 빌라는 매매 시세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을 노려 빌라를 사들인 뒤 세입자의 전세 보증금으로 잔금을 치렀다. 이렇게 약
1000채에 이르는 주택·상가 등을 자신과 주변인의 명의로 매입했다.
제임스네이션 피해 주택 1093채 지역 분포도 (단위: 채)
총 보증금 2190억 원
김용현은 신축 빌라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개인과 제임스네이션 법인에 대한 보유세(종합부동산세+재산세) 부담이 커지자 어머니와 지인 명의 등으로 집을 추가로 매수했다. 경찰 조사 결과 김용현 등이 연체한
체납세금(국세+지방세)은 약 70억 원에 이른다.
김용현에게 피해를 봤다고 호소하는 세입자는 2018년부터 나오기 시작했지만 김용현 일당은 2023년 7월에야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서울경찰청광역수사단 금융범죄수사대는 같은 달 21일 범죄집단조직죄 및 사기 혐의로 김용현과 총괄관리자 2명
등 3명을 구속해 검찰에 넘겼다. 이들과 공모한 공인중개사 등 조직원 28명을 불구속 입건해 검찰에 송치했다.
사례1. 무자본 갭투자의 늪에 빠지다
30대 주부 김모 씨는 2018년 3월 김용현이 보유한 수도권의 한 신축 빌라에서 전세살이를 시작했다. 당시 지인이 소개해 준 공인중개사는 “준공된 지 9개월밖에 안 된 깨끗한 신축 매물이 있다”고 했다. 김 씨는 그길로 2억3000만 원에 전세
계약을 맺었다. 방 3개, 화장실 2개의 신축 빌라 전세금치고는 높지 않다고 판단했다.
한 차례 계약을 갱신한 김 씨는 2021년 5월 어느날 부동산 온라인 플랫폼을 보다가 가슴이 철렁했다. ‘2000만 원이면 신축 빌라 갭투자 가능’이라는 온라인 매물 광고에 김 씨의 집이 올라온 것. 뉴스로만 보던 ‘무자본 갭투자’였다. 수소문해
보니 이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피해 사실을 깨달은 2021년 5월부터 2년 3개월이 지났지만 김 씨는 전세 사기 빌라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2022년 5월부터 올해 4월까지 11개월 동안 22차례 김 씨가 사는 빌라에 대한 공매가 열렸지만 모두 유찰됐다. 김 씨는 “운 좋게 청약에
당첨됐는데 잔금을 낼 돈이 없다”며 “억울하고 분하다”고 말했다.
2. 김용현은 어떻게 ‘네이션’을 구축했나
제임스네이션 전세 사기가 기존 수법과 다른 점은 김용현이 공인중개사 등을 직접 채용해 부동산중개사무소를 개업하고, 주택관리업체를 따로 두는 등 마치 대기업이 계열사를 두듯 사업체를 운영했다는 점이다. 회계법인에 의뢰해 그럴듯한
사업계획서를 만든 뒤 투자자나 임차인, 임대인 등에게 홍보용으로 배포하기도 했다.
제임스네이션 사업계획서에 따르면 이 회사는 부동산 중개, 주택임대관리, 인테리어·주택보수, 가전·가구 렌털 등 자회사 4곳을 두고 있다. 경찰 조사결과 부동산 중개업체를 제외하면 실적이 거의 없었다. 투자자 모집을 위한 껍데기 회사였던
셈이다. 인테리어·주택보수 업체와 부동산 중개업체는 고객, 세입자 모집을 위해 유튜브 채널 2곳도 개설했지만 매물 10여 개만 올린 뒤 활동하지 않았다.
보통 신축 빌라가 지어지면 건축주는 집을 분양해줄 분양대행업체와 계약을 맺는다. 이때 분양대행업체는 매매 컨설팅업자와 전세 컨설팅업자에게 연락한다. 매매 컨설팅업자가 ‘매수인’을, 전세 컨설팅업자가 ‘세입자’를 구해와 계약을
성사시키면 각각 수수료를 받아간다.
경찰에 따르면 보통 전세 사기는 매수인을 구하는 조직과 세입자를 구하는 조직이 따로 있다. 그런데 김용현은 양쪽 업자가 받는 리베이트를 모두 챙기기 위해 법인을 세우고 조직화했다. 김용현 일당이 분양대행업체에 가서 “가지고 있는 빌라
매물을 우리한테 넘기면 세입자는 알아서 맞추겠다”며 분양 계약을 한 것.
이를 위해 김용현은 제임스네이션에 영업팀(15명), 중개팀(8명), 홍보팀(4명), 회계팀(1명) 등을 따로 뒀다. 영업팀은 수도권에서 신축 빌라 분양 정보를 알고 있는 분양대행업체를 만나 분양이나 매수 계약을 체결하는 업무를 맡았다. 김용현과
함께 구속된 부동산 컨설팅업자 2명이 영업팀 업무를 이끌었다.
영업팀이 계약을 체결하면 중개팀을 투입했다. 김용현 일당은 공인중개사 5명을 채용해 마포구 합정동에 부동산중개사무소를 차렸다. 이 중개사무소는 영업팀이 계약한 매물 전단을 만들어 온라인 부동산 플랫폼과 유튜브 채널에 홍보하고, 이를
보고 찾아온 세입자와 전세 계약을 중개했다.
더 많은 세입자를 모으기 위해 홍보팀도 운영했다. 홍보팀은 중개팀이 만든 전단을 직접 들고 빌라 매물 주변 현지 부동산중개사무소를 방문했다. 홍보팀은 “임차계약을 성사시키면 수수료로 200만~500만 원씩 줄 테니 임차인만 구해 달라”며
현지 부동산을 끌어들였다.
사례 2. 현지 부동산중개사무소
“수수료 안 받을게요. 집 싸게 잘 나왔어요”
직장인 최모 씨(40)는 2017년 10월 서울 양천구 신월동의 한 부동산중개사무소를 임장했던 날을 잊지 못한다. 당시 중개사무소는 “방 3개에 준공 2년 된 신축빌라가 있는데, 보증금은 1억6000만 원밖에 안 된다”며 “중개수수료는 안 받겠다”고
했다. 집주인과 친해서 매물을 전담으로 관리하는 대신 세입자한테는 수수료를 안 받기로 했다는 것.
최 씨는 “주변 매물과 비교해도 2000만~3000만 원 저렴했다”며 “생각해 보면 현지 부동산중개사무소는 수수료 대신 리베이트를 받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최 씨는 현재 매달 전세대출 이자로만 100만 원 넘게 내고
있다. 보증금을 되찾기 위해 경매를 신청했지만 올해만 3번 유찰됐다.
3. 김용현은 누구인가
세입자들은 공통적으로 김용현이 ‘젊은 나이에 성공한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다’고 입을 모은다. 본보가 입수한 ‘제임스네이션 사업계획서’에 따르면 실제로 김용현은 성공한 젊은 스타트업 대표처럼 자신을 홍보한 것으로 보인다. 김용현은 이
계획서에서 댄스 아카데미 프랜차이즈 가맹점 4곳 운영, 경북 최초 태권도 5단 최고 합격, 주식 투자로 수익률 1000% 달성 등 화려한 수식어가 달린 여러 이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경찰 조사에서 대부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제임스네이션 사업계획서 중 대표이사 소개 페이지
경찰에 따르면 김용현은 서울 마포구 홍대 클럽에서 가드 일을 하다가 부동산 컨설팅업자 2명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전세 사기를 공모하기 시작했다. 경찰 관계자는 “직업 자체가 뚜렷하지 않고 돈도 없었다”고 했다.
특히 김용현은 본격적으로 범죄를 저지르기 전인 2015년 4월 이미 은행 빚 등 개인 채무로 개인회생 인가를 받을 정도로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2016년 전세 사기를 목적으로 무자본 갭투자를 할 때부터 임차보증금을 돌려줄
생각도 능력도 없었던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김용현은 서울 강서구 화곡동 주상복합에 보증금 1억 원, 월세 150만 원을 내고 거주했다. 법인 리스로 BMW, 레인지로버 등 고급 외제 차량 8대를 보유하고 아버지와 누나,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사례3. “김용현이 성공한
임대사업자라고 생각했어요”
김모 씨(40) 부부는 2016년 11월 강서구 화곡동에 있는 신축 빌라를 계약했다. 여러 후보 중 위치와 구조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신축 빌라. 보증금도 1억9500만 원으로 주변 시세보다 500만 원 이상 저렴했다. 부부는 망설이지 않고 계약을
서둘렀다. 2년 뒤인 2018년. 계약을 연장하기 위해 집주인인 김용현에게 연락했더니 대리인이 계약서를 들고 집 근처 카페로 찾아왔다. 대리인까지 부리는 임대 사업자. 김 씨는 “당시에는 집주인이 젊은 나이에 부자가 된 엄청난 사람인 줄
알았다”고 했다.
계약 만료를 5개월 앞둔 2020년 여름. 김 씨는 남편의 직장 근처로 거주지를 옮기려 했지만 결국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김 씨 부부는 어쩔 수 없이 임차권 등기를 해둔 채 경기 김포시 아파트로 전셋집을 옮겼다. 세입자를 구하는 대로
보증금을 돌려주겠다는 대리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김 씨는 “빌라 전세대출 9000만 원을 비롯해 아파트 전세대출 4억 원에 대한 이자만 매달 200만 원 정도”라며 “2세 계획을 포기했다”고 한숨을 쉬었다.
4. 얼마나, 어떤 피해를 입혔나
경찰 조사에 따르면 김용현 일당이 2016년 1월부터 2021년 12월까지 매수한 수도권 빌라는 총 1093채로 피해 보증금 규모만 219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1093채에 대한 리베이트 금액만 92억 원으로 파악된다.
다른 전세 사기 사건과 비교해도 피해 규모가 작지 않다. 수도권 일대에서 무자본 갭투자로 전세 사기를 벌인 ‘세 모녀 전세사기단’의 피해 세입자는 최소 305명, 총 피해 규모는 680억 원대에 이른다. 경기 화성시 동탄신도시 일대 오피스텔을
무자본 갭투기한 ‘동탄 전세사기 부부’는 피해자 238명에게 170억 원 상당의 보증금을 편취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수도권 일대에서 빌라 2000채 이상을 사들여 전세사기를 벌이다 사망한 이른바 ‘빌라왕’ 김모 씨 일당은 공범만 총
60명이다. 매수한 주택은 총 2034채로, 임차인 1668명에게서 전세보증금 3280억 원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제임스네이션 사건의 경우 실제 규모와 관계 없이 수사를 통해 구체적인 피해가 확인된 인원은 339명, 피해 보증금은 총 680억 원이다. 이를 통해 김용현 일당이 리베이트로 가져간 금액은 18억 원으로 조사됐다.
다만 이는 피해자 진술이 있거나, 세입자가 HUG 전세보증금 반환보증에 가입해 HUG가 김용현 일당 대신 보증금을 갚아준 물건만 취합한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김용현이 보증금 돌려막기를 할 때 보증금을 받고 이사를 한 세입자도 일부 있는데
이들은 피해 진술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며 “피해 규모는 더 늘어날 수 있다”고 했다.
5. 피해자 구제 왜 늦어지나
2017년 이후 제임스네이션 관련 경공매 물건 현황
*경공매 진행 중인 건수는 취소, 취하, 연기 등 포함
자료: 지지옥션
제임스네이션 사건 피해자들 중 상당수는 장희정 씨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전세 사기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7년 이후 제임스네이션 이름으로 경매 또는 공매에 나온 물건 650채를 분석한 결과 지금까지 낙찰된 물건은 총
286건(44%)에 그친다. 낙찰까지 평균 5.11회 유찰됐고, 최고 27회까지 유찰되다가 낙찰된 물건도 있다. 절반 이상은 현재 경매가 취소되거나 경매가 진행 중이다. 전세 사기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경매가 진행 중인 물건은 피해 구제가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경매가 시작되지 못했거나, 피해 구제 자체를 포기한 피해자도 상당수일 것으로 보인다.
경매가 진행되더라도 피해자들이 전세보증금을 온전히 되찾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제임스네이션 같은 전세 사기 사건 피해자는 대항력을 갖춘 선순위 세입자와 대항력이 없는 후순위 세입자로 나뉜다. 대항력은 집주인과 제3자에게 세입자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경매 절차에서 세입자가 전세보증금을 우선 돌려받으려면 전입신고와 확정일자가 집을 담보로 한 채무나 가압류 등 다른 권리보다 빨리 설정돼 있어야 한다.
선순위 세입자는 경매에서 낙찰자가 나오면 낙찰자에게 보증금을 모두 돌려받을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전세보증금 자체가 집의 실제 가치, 즉 매매가격보다 높게 체결됐기 때문에 경매에서 낙찰이 잘 되지 않는다. 아무리 유찰을 거듭해 가격이
떨어진다고 해도, 세입자에게 내줘야 할 보증금을 고려하면 결국 시세보다 비싸게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희정 씨처럼 불법건축물에 살고 있는 피해자들은 전세 사기 탈출이 더 힘들다. 불법건축물은 건축법을 위반해 개조하거나 용도와 다르게 사용하는 건물을 말한다. 장 씨처럼 공용 공간을 무단으로 불법 증축하거나, 근린생활시설(근생)로
분류된 공간을 주거용으로 개조해 사용하는 근생 빌라는 모두 불법 건축물이다.
불법 건축물이더라도 주거용으로 사용하는 경우 확정일자와 전입요건을 갖추면 경매 절차 때 대항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불법 건축물은 대부분 경매에서 낙찰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낙찰을 받으면 지방자치단체에 일종의 벌금인
이행강제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불법 건축물은 전세자금대출이 나오지 않고 전세보증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어 세입자를 구하기 어렵다. 낙찰자가 불법 증축을 원상복구하거나 실제 용도에 맞게 상가 같은 근린생활시설로 이용하는 방안도
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원상복구에 추가 비용이 들고, 근린생활시설로 이용하려고 해도 입지가 좋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어서 수익을 내기 어렵다.
제임스네이션 경공매 물건 650건 용도별 현황
단위: 채, 필지, 실
사례 4. 유찰만 5번,
끝나지 않은 전세사기
제임스네이션 전세사기 피해자 이모 씨(48)가 살고 있는 서울 송파구 빌라는 올해만 5번 경매를 진행했지만 모두 유찰됐다. 이 씨가 살고 있는 집은 근린생활시설을 주거용도로 변경한 불법 건축물이다. 이 건물에 김용현이 보유한 집이 모두
8채인데 하필 이 씨의 집이 불법 건축물이었던 것.
이 씨와 비슷한 시기에 경매에 들어간 같은 건물 정상 물건들은 하나 둘씩 경매 낙찰자가 나오고 있지만, 이 씨 매물은 유찰을 거듭하며 경매 최저가가 1억1000만 원까지 하락했다. 2017년 4월 계약 당시 보증금 1억8000만 원보다도 7000만 원
하락한 것. 이 씨는 “낙찰자가 나와 이사를 가는 이웃을 볼 때마다 기대감도 생겼지만 이제 자포자기했다”며 “직접 낙찰을 받아 이행강제금을 내며 살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 중”이라고 했다.
경찰 조사 때 피해자로 집계된 사람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경찰은 김 씨 등 피의자들이 보유한 396억 원 상당의 부동산(203채)에 대해 기소 전 몰수보전을 신청했다. 피의자들 소유의 부동산, 예금채권, 차량 등 18억 원 상당을 추징보전
신청했다. 재판이 끝나기 전까지 해당 재산을 처분할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해 둔 것이다. 재판이 끝나고 이를 채권자(세입자)들이 나눠 일부라도 보증금을 보전하기까지는 수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