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

'삶'을 시각화하기

‘내용’에 앞서 ‘형식’부터 따져봤다
지민구 기자|동아일보 산업1부 2022-08-17 08:53:55
의로운 죽음과 남겨진 사람들. 꽤 오래전부터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언젠가는 한 번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였다.

2월 16일.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모든 취재 기자를 대상으로 새로운 히어로콘텐츠팀의 주제를 공모 받는 마지막 날이었다. 베이징 겨울 올림픽 쇼트트랙 중계방송을 보다 노트북을 펴 아이디어를 적어 이메일을 보냈다.

‘편집국 산업1부 지민구, 아이디어 제출합니다.’

한 달 뒤. 점심시간을 앞두고 전화를 받았다. 제출한 아이디어가 다섯 번째 히어로콘텐츠팀의 주제로 선정됐다는 공지였다. 아, 드디어 생각했던 주제로 기사를 써보는구나.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깊게 취재하면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를 꺼내어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솟아났다.

그리고 다음 날. 코로나19가 무섭게 퍼질 때였다. 기획자이자 프로젝트 매니저(PM)인 위은지 기자와 화상 회의로 처음 만났다. 위 기자는 첫 회의에서 ‘디지털 오리지널 콘텐츠’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래, 디지털 중요하지. 우리가 쓴 기사가 디지털에서 잘 읽을 수 있게 잘 구현해야지. 사진과 영상을 적절히 배치해야 할 테고. 조금은 세련된 디자인에 그리고 화려한 인터랙션(상호작용) 기능까지 넣으면 볼만하겠지? 아,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글을 재밌게 읽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텍스트가 어쩌고, 글의 힘이 저쩌고, 라는 이야기만 무한 반복했다. 노트북 화면 속에 보이는 위 기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하고 있는데 그걸 알아채지 못한 채 혼자 말을 이어갔다. 그때 위 기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5개월이 지난 지금도 아직 묻지 못했다. 아마 딴 세상에 사는 사람을 지켜보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디지털 콘텐츠에 관한 이해도가 부족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사실 아직도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뭘 보여줄 수 있어요?”
4월 12일 히어로팀 5기의 첫 전체 대면 회의에서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글쓴이.4월 12일 히어로팀 5기의 첫 전체 대면 회의에서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글쓴이.
히어로팀 5기 출범 한 달째. 코로나19가 한 차례 지나고 처음으로 모든 구성원이 모여 대면 회의를 하기 위해 기획자는 물론이고 웹 개발자, 디자이너, 사진·그래픽 기자까지 모두 모인 자리였다. 모든 구성원을 앞에 두고 프레젠테이션 자료까지 준비해 떠들었다. 히어로팀 5기의 핵심 스토리가 무엇인지, 어떤 취재원을 섭외하고 있는지 등을 전달했다. 20분쯤 지났을까. 실컷 떠들고 나니 한 참석자가 손을 들고 물었다.

“다 좋은데요. 독자들에게 뭘 보여줄 수 있어요?”

“세상을 떠난 제복 공무원의 가족들이 살아 있고, 그들이 계속 삶을 이어가고 있고, 살아온 스토리가 있고, 그걸 잘 기록하면…”

“그래서 그분들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어요?”

“그분들의 생활이나 감정 변화를 사진, 영상으로 담고… 또…”

“어떻게 촬영할 건데요?” “그분들의 감정이 매일같이 드라마틱하게 변하나요?” “그걸 그때그때 포착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나요?”

“어… 그게, 순직 당시 사건을 다시 재구성해 보거나… 그러면…”

“순직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것은 저희가 만들고자 하는 콘텐츠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지 않나요?”

날카로운 질문이 쏟아졌고, 준비되지 않은 답변이 이어졌다. 애꿎은 마이크만 만지작거리며 진땀을 흘렸다. 그렇게 진땀 흘리는 하루가 지났다.
4월 12일 회의에서 글쓴이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쏟아낸 히어로팀 5기 구성원들.4월 12일 회의에서 글쓴이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쏟아낸 히어로팀 5기 구성원들.
남겨진 사람들(유가족)의 이야기를 잘 듣고 스토리로 잘 정리하면 될 줄 알았는데, 큰 착각이었다. 유가족이 느낀 슬픔과 상처를 취재해 글로 보여준다는 생각은, 10년 간 기사를 글로만 쓴 기자의 좁은 사고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때부터 ‘비주얼라이징(Visualizing·시각화)’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짓눌렀다. 이미 세상을 떠난 제복 공무원과,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솔직히 잘 떠오르지 않았다. 소재부터 한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깊은 고민이 이어졌다.

다시 처음부터 돌아가 한 달 전 회의록과 참고 자료를 뒤졌다. 위 기자가 잠시 소개해준 뉴욕타임스(NYT)의 기사 <What Loss Looks Like>가 눈에 들어왔다.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난 고인의 추억이 담긴 물건. 다양한 물건 속에 담긴 고인과 사랑하는 가족의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을 준 기사였다.
다시 쓰는 오비추어리
오비추어리(Obituary). 신문에 실리는 부고 기사를 말한다. 그동안 신문 기자는 글로 죽음을 기록했다. 남겨진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로만 내용을 채웠다. 사진이나 영상도 대체로 뻔했다. 영정 사진, 묘비, 그리고 슬퍼하는 유가족. 이것이 신문에 담을 수 있는 오비추어리의 최선이었다.

NYT의 디지털 기사를 보며 이러한 전형적인 오비추어리 기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다른 이를 구하려다가 세상을 떠난 제복 공무원. 조금이라도 새로운 이미지와 이야기로 그들을 설명하고 싶었다.

‘다시, 그리고 새롭게 쓰는 오비추어리.’

원점에서부터 오랜 논의 절차를 거쳐 히어로팀 5기는 이러한 콘셉트를 처음으로 확정했다. 그렇게 히어로팀 5기의 첫 번째 디지털 콘텐츠 <그들은 가족이었습니다> 취재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취재 대상은 군, 경찰, 소방 등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다가 세상을 떠난 제복 공무원의 유가족들. 그들이 남긴 유품과, 가족과의 추억이 담겨 있는 물건을 같은 콘셉트로 촬영해 사연을 담아 보여주자는 게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7월의 어느 날. 사진 촬영을 위해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강원 태백으로 향하고 있는 글쓴이.
7월의 어느 날. 사진 촬영을 위해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강원 태백으로 향하고 있는 글쓴이.
서울, 대구, 경기 수원, 경북 칠곡군 왜관, 경남 거제, 전남 여수, 강원 원주·태백, 제주 등. 고인 11명이 남긴 물건을 촬영하기 위해 글쓴이를 포함한 취재 기자 4명은 전국을 다녔다. 가방에는 늘 물건의 배경이 될 검은 천과 빌려온 사진기를 지니고 있었다.

고인이 살던 집에서 가족들은 생각하지 못한 물건을 꺼냈다. 남편이 프로포즈를 위해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들여 쓴 편지. 강인한 조종사 아들이 늘 간직하고 지냈던 귀여운 캐릭터 인형.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뒤 세상에는 ‘영웅’으로 기록됐지만,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으로 남아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곳에 있었다. 가족이 꺼내온 물건이, 우리가 찍고 있는 물건이 고인을 대신해 그들의 삶을 이야기 했다.

글이나 말로 전할 수 없는 고인의 이야기가, 사진 한 장에 담겼다. 그렇게 24장의 사진을 모아, 히어로팀 5기는 물건을 통해 떠나간 이와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그들은 가족이었습니다>를 제작했다.

히어로팀이 출범한 뒤 시리즈 전체를 디지털 콘텐츠와 지면 기사로 분리해 제작, 출고한 첫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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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7~08.12·시리즈 2화·히어로콘텐츠 5기
지민구 기자
지민구 기자|동아일보 산업1부

역사를 공부하려다 기자가 돼 정치, 경제, 산업, 사회 분야를 취재했습니다. 거대한 사회 현안을 다룰 일이 많았지만, 사실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과 소집단의 삶을 탐색하며 기록하는 일이 더 즐겁습니다. 히어로콘텐츠팀에서의 첫 발걸음을 계기로, 앞으로 더 나아가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