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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사건의 이면으로 독자를 초대하기

‘표류’ 주제 선정부터 기사 출고까지
조건희 기자|동아일보 정책사회부 2023-04-18 14:53:05
응급환자가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떠도는 ‘표류’는 흔한 일이다. 기사도 자주 나왔다. 반면 그 뒤에 도사린 문제는 여러 이해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어떻게 하면 흔한 사건의 깊숙한 곳으로 독자를 초대할까.

영화 <시>(2010년)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사과를 몇 번이나 봤어요? 천 번? 만 번? 아니요, 지금까지 여러분은 사과를 진짜로 본 게 아니에요. 사과라는 것을 정말 알고 싶어서,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보는 것이 진짜로 보는 거예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의 한 장면 ⓒ영화 ‘시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의 한 장면 ⓒ영화 ‘시
6기 히어로콘텐츠 <표류: 생사의 경계에서 떠돌다>는 흔한 응급의료 문제를, 독자가 마치 처음 제대로 마주보는 것처럼 소개하려는 시도였다.
흔한 소재를 히어로콘텐츠 주제로
6기는 4, 5기와 달리 사전에 정해진 주제가 없었다.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국내외 언론사의 탐사보도와 인터랙티브 콘텐츠를 훑었다. 선구자의 땀과 고민이 담긴 프로젝트를 섭렵하면서 원칙과 기준을 잡을 수 있었다. △생생한 현장(시각화를 위해) △사람 이야기(공감과 몰입을 위해) △무게감(장기간 취재·제작에 걸맞도록) △사회에 미칠 영향. 이 4가지를 아우르는 주제를 찾기로 했다.

응급의료를 아이템 회의에 처음 낸 건 팀을 꾸린 지 2주가 지났을 때였다. 처음엔 너무 자주 다룬 주제여서 히어로콘텐츠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주 나온 얘기’를 뒤집어보면 그만큼 여러 차례 반복되면서도 해결이 안 되는 문제라는 뜻이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빅카인즈’에서 ‘응급환자 사망’으로 검색하면 1990년 이후 관련 기사가 4000건 가까이 나온다.한국언론진흥재단 ‘빅카인즈’에서 ‘응급환자 사망’으로 검색하면 1990년 이후 관련 기사가 4000건 가까이 나온다.
환자가 허무하게 숨지고, 정부가 대책을 내놓고, 다른 이슈에 묻혀 흐지부지되고, 또 다른 환자가 숨지고…. 반복되는 굴레의 원인을 파고들어 고발하는 건 심층 취재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만 가능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무엇보다, 당사자인 환자의 절망을 제대로 다룬 적이 없었다. 생사의 경계를 헤맬 땐 누구나 무력한 존재가 되고 약자 중의 약자가 된다. 그런데 이런 수많은 ‘A 씨’들이 목소리도 없이 잊힌다. 온전히 환자의 눈과 귀로 사건을 따라가기만 해도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취재팀은 치열한 토론 끝에 ‘표류’를 아이템으로 정했다.

바깥에서는 ‘식상하다’는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기시감이 강해 관심조차 끌지 못할 거란 우려도 있었다.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심각하다고 외친들 독자가 읽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다. 충격을 줘야 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방식으로 보여줘야 했다. 아니, 체험하게 해야 했다.
기획과 취재의 끝없는 대화
‘독자에게 ‘체험’을 선사할 인터랙티브 기사’. 그 기획을 최우선에 두고 취재기자와 기획자, 개발자, 디자이너가 머리를 맞댔다. 문제의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방식을 여러 직군이 함께 고민하는 건 그 자체로 신선한 자극이었다.

‘표류’에 접목할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해외 언론뿐 아니라 ‘구찌’ 등 해외 고가 브랜드의 홍보 사이트나 소셜미디어(SNS)가 만든 미니게임까지 참고했다. 전 세계의 실력자들이 소비자의 시간을 1초라도 더 사기 위해 기상천외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얼핏 기획안이 완성되면 그에 맞춰 취재를 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 해보니 기획과 취재에 선후도, 우열도 없었다. 테니스공을 주고받는 것처럼 동시에 진행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획대로 취재가 되지 않거나 막상 구현해보니 별로면 도공이 도자기를 깨는 심정으로 기획을 엎었다.
초기 기획 중 하나였던 ‘병상 찾기’ 페이지. 결과값 도출에 오랜 시간이 걸려 포기했다.초기 기획 중 하나였던 ‘병상 찾기’ 페이지. 결과값 도출에 오랜 시간이 걸려 포기했다.
초기 기획 중 하나는 환자가 주소를 넣으면 그 시간 가까운 응급실에 빈 자리가 얼마나 있는지 표시해주는 거였다. <양육비계산기>처럼 독자가 직접 눌러보면 ‘병상이 이렇게 없다고?’라는 충격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웬걸, 정부망 문제로 주소를 입력해도 빈 자리가 표시되기까지 30초가 넘게 걸렸다. 독자가 기다려줄 수 없는 시간이었다. 기획도 접어야했다.

정부 회의록을 통해 같은 대책이 반복돼온 문제를 지적하자는 기획은 속기록이 남아있는 회의가 거의 없었던 탓에 무산됐다. 상반되는 두 환자의 현재를 대조하자는 기획은 막상 구현해보니 시각적으로 심심했다. 둘 다 접었다.

거꾸로 현장에서 건져올린 재료가 예상보다 탄탄하면 기쁜 마음으로 기획을 뒤엎었다. 올 1월 12일 기자가 119구급차에 동승했을 때가 그랬다. 서울 송파구 한복판에서 가슴 통증으로 119에 신고한 김진수(가명·68) 씨가 응급실에 가기까지 병원 26곳에 전화를 31차례 하는 모든 과정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고프로를 활용해 빠르게 질주하는 119구급차의 모습을 담는 기자의 모습이 360° 영상에 잡혀있다.
고프로를 활용해 빠르게 질주하는 119구급차의 모습을 담는 기자의 모습이 360° 영상에 잡혀있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완성된 인터랙티브 기사가 <그들이 구급차를 탔던 날>과 <강남에 응급실이 없었다>, <‘표류’ 속으로> 등 3건이다. 끝없는 수정을 거친 덕분에, 독자 체험이라는 기획 목표에 가까이 다가간 결과물을 낼 수 있었다고 자평한다.
두 개의 문과 두 명의 주인공
현장을 확보하는 건 간단해 보이지만 모든 걸음이 가시밭 위였다. ‘표류’의 핵심인 119구급차 동승 허가를 받아내는 데 꼬박 석 달이 걸렸다. 소방 측은 일선 구급대와 병원의 협력 관계가 틀어질까 봐 걱정했다. 타당한 우려였다. 소방청과 각 소방재난본부를 여러 차례 찾아다니며 ‘병원을 가해자처럼 묘사할 의도가 없다’고 설명한 끝에 구급차 문을 열 수 있었다.

응급실 협조를 구하는 것도 간단하지 않았다. 환자를 수술할 의사가 없어 다른 병원으로 전원(轉院) 보내는 현장을 꼭 담아야 했다. 대다수 병원이 이를 치부라고 여기고 손사래 쳤다. 특정 병원을 탓하는 기사가 아니라, 수술 의사가 부족한 구조를 겨냥하는 기사라는 걸 납득하고야 비로소 응급실 문을 열어줬다.

취재팀은 구급차와 응급실에서 총 37일을 보냈다. 응급환자가 몰리는 연휴를 놓치지 않으려 크리스마스와 신정, 설 연휴에도 현장을 지켰다. 기약 없는 ‘뻗치기’였지만 지난했던 섭외 과정을 생각하면 귀한 기회로만 느껴졌다. 그렇게 길어 올린 잠실119구급대와 여수전남병원 응급실의 현장 르포가 지면 시리즈 1회를 장식했다.

‘주인공’ 찾기도 병행했다. 독자가 ‘표류’를 내 가족, 내 이웃의 이야기로 느끼려면 감정을 이입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표류’가 삶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으면서 △실명과 얼굴을 공개할 수 있고 △사건 당시를 재구성할 자료가 남아있는 환자여야 했다.

취재팀이 인터뷰한 26명의 환자와 보호자 중에 이준규 군(14)과 박종열 씨(40)가 그에 부합했다. 취재팀은 두 환자를 인터뷰하고 나서 지면 시리즈 구성을 뒤엎었다. 당초 각 회차를 ①구급차 ②응급실 ③수술실 ④상황실 ⑤회의실 등 공간으로 나누고 다양한 ‘표류’ 환자를 소개하려 했다. 이를 준규 군과 종열 씨 두 환자를 중심으로 재편했다. 두 환자의 이야기에만 철저하게 집중해야 오히려 전체 응급의료 체계의 문제를 실감나게 조망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준규 군과 박종열 씨.이준규 군과 박종열 씨.
취재팀은 준규 군과 종열 씨가 각각 겪은 228분, 378분의 표류를 ‘1분 단위’로 철저하게 복기하기 위해 미공개 자료를 포함해 총 1300쪽이 넘는 기록을 검토했다. 두 환자를 이송했던 구급대원과 진료했던 의사 등 31명을 인터뷰했다. 준규 군의 어머니와 종열 씨는 고통스러운 재활 과정을 거치면서도 취재를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이유는 단 하나. ‘다른 사람이 우리와 같은 일을 겪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피가 바싹바싹 말랐다”
2023년 3월 27일부터 인터랙티브 기사 3건과 지면 시리즈 5회가 순차적으로 공개됐다. 언론계엔 ‘너무 오래 취재하면 기사가 되는 건지 아닌지 점점 헷갈린다’는 얘기가 있다. 고백건대 첫 기사가 게재되는 날 새벽까지 초조했다. 준규 군과 종열 씨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결심으로 내놓은 기사가 ‘또 응급의료 얘기구나’ 라는 무관심 속에 사라질까봐 그랬다.

첫 기사에 “올해 본 것 중 가장 무서운 기사”라는 댓글이 달렸다. 기사를 읽으며 피가 바싹바싹 말랐다는 반응도 있었다. 그걸 보고 비로소 진심이 통했다는 걸 느꼈다. 흔한 문제를 처음 보는 것처럼 실감시키자는 목표를 어느 정도 이뤘다고 생각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말이 없는 환자와 유족을 대신해 그 울분을 세상에 외쳐주었다”고 평가해줬다.

시리즈 마지막 기사가 나가고 이틀 후인 4월 5일, 국민의힘과 보건복지부는 ‘소아·응급·비대면 의료 대책 당정 협의회’를 열고 응급의료 대책을 발표했다. ‘표류’ 시리즈에서 제안한 핵심 대책 2가지가 모두 당정 발표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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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과 구급차에서 37일을 보내며 26명의 ‘표류’ 환자와 그 가족을 인터뷰했습니다.
2023.03.27~04.03·히어로콘텐츠 6기·
조건희 기자
조건희 기자|동아일보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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