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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명을 쓴 이유

공익과 개인의 인권 사이
조유라 기자|동아일보 히어로스쿼드 2023-12-27 10:00:01
히어로팀의 원칙
히어로콘텐츠가 처음 출범한 이후, 경험적으로 형성된 원칙 중 하나는 ‘실명의 취재원’이다. 실명의 취재원만큼 진정성과 폭발력을 갖춘 주인공은 없다. 일상 생활을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친구가 “내 친구의 친구 이야기인데~”라고 하는 것보다는 “내 이야기인데~”라고 운을 떼는 것이 더 집중도가 있지 않은가.

‘실명의 취재원’이 가진 힘은 6기에 달하는 이전 히어로팀들이 증명해 왔다. 직전 기수였던 ‘표류: 생사의 경계를 떠돌다’에서는 실제로 응급의료 표류 상황을 겪었던 이준규 군과 박종열 씨가 등장한다. 독자들은 실명의 주인공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기사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언젠가 내 이야기가 될 수 있겠구나’라며 깊이 공감했다.
주제 선정 단계에서 칠판에 적어두고 항상 보던 원칙 네 가지.주제 선정 단계에서 칠판에 적어두고 항상 보던 원칙 네 가지.
우리에게도 실명의 취재원은 중요한 원칙이었다. 7기가 꾸려지고, 화이트보드에 적은 원칙 네 가지에는 실명의 주인공도 포함됐다.
우리가 원칙을 깬 이유
아동 유기, 방임을 주제로 잡은 뒤, 팀 내부에서도 ‘아이들의 실명을 공개하는 게 옳은지’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우리의 목적은 명확했다. 더 이상 품을 잃은 아이들이 생기지 않게 하자는 것. 아동 유기와 방임이 기사를 통해 다뤄진다면 이에 대한 사회 구성원의 경각심을 일으키고, 독자들이 아동 인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유기든 방임이든 명확한 범죄이고, 아이들은 범죄의 피해자다. 실명을 포함해 피해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우리가 만나는 아이들은 자신의 정보나 신원이 드러나는 것에 대해 결정할 수 없는 나이이기도 했다. 이 아이들의 신상을 보호자나 친권자의 동의가 있었다는 이유로 공개해도 되는 것인지도 논쟁거리였다.

그래서 이번 히어로팀의 중요한 과제는 보도를 통한 공적 이익과 아동 개인의 인권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 됐다. 이번 시리즈 2화의 주인공이었던 혁재(가명)는 기존에 보도됐던 아동 방임 사건의 피해자다. 혁재가 겪은 방임과 이후 회복하는 과정이 보도된다면, 두 아이처럼 보호가 필요한 아동과 가정에 지원과 주목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올해 막 네 살이 된 아이가 작은 몸으로 겪은 회복기 자체가 주는 힘과 울림이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모든 삶에서 안고 가야 하는 이는 혁재다. 누구에게나 비밀과 치부가 있듯이 성장한 혁재에게는 이 모든 과정이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일 수 있었다. 단지 어리다는 이유로, 의사 표현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혁재의 동의 없이 아이의 신원이 공개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
유기, 방임, 학대 등으로 보육원에 아동이 들어올 때 작성하는 카드. 아동의 개인 정보가 많이 들어있다. 내 개인 정보가 이 정도 수준으로 알려진다면 어떨까.유기, 방임, 학대 등으로 보육원에 아동이 들어올 때 작성하는 카드. 아동의 개인 정보가 많이 들어있다. 내 개인 정보가 이 정도 수준으로 알려진다면 어떨까.
그래서 어떻게 했나
그래서 실명 보도 원칙을 일부 포기했다. 조건은 두 가지였다. 아동이 △범죄 피해자이면서 △스스로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경우를 모두 만족시키는 경우 가명을 사용했다.

재은이와 혁재 남매는 두 조건에 모두 해당하는 아이들이었다. 재은이는 사망했기 때문에, 혁재는 의사 표현이 불가능하고 자신의 미래를 고려한 판단이 어려운 나이이기 때문이었다. 1화 주인공이었던 유준(가명)도 혁재와 마찬가지다.

3화 주인공이었던 박가람 씨는 영아 유기의 피해자이지만 현재 성인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보도의 영향력에 대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동의를 얻어 실명과 신상을 공개했다. 4화 주인공인 정희재, 나종민 군은 아동 스스로의 의사를 확인했다. 보도로 인한 영향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는지도 거듭 물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로 입양과 가정위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길 바랐다. 두 아이의 보호자인 정재호, 고진예 부부에게도 아이들의 실명 공개에 대해 동의를 구했다.

실명 보도가 어려운 경우라면 최대한 아이의 이야기를 다각도로 전달하고자 했다. 혁재의 경우 방임 사건 자체를 단순히 ‘철없는 20대 부모가 아이들을 방임했다’로 다루지 않도록 노력했다. 왜 부모가 아이들을 방임했는지, 부모들의 성장 과정은 어땠는지, 사회경제적 배경은 어땠는지 알아야 유기와 방임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이를 위해 사건 담당 검사, 변호사 등 관련 인물들을 취재하고, 판결문을 꼼꼼하게 분석했다.
혁재 영상을 보여주며 회복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김정선 씨(왼쪽). 혁재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눈이 반짝이면서 말이 빨라졌다.혁재 영상을 보여주며 회복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김정선 씨(왼쪽). 혁재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눈이 반짝이면서 말이 빨라졌다.
기사에는 시혜적이거나 온정적인 시선을 배제하고자 했다. 의도적으로 최대한 건조한 단어를 사용해 상황을 묘사하는 데 공을 들였다. 독자들이 기자의 주관적 시선으로 아동을 보기보다, 아동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감정적이거나 한쪽으로 치우친 표현은 기사 작성 과정에서 팀원들 간 피드백을 통해 덜어냈다. 김정선 씨는 인터뷰 내내 혁재에 대한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말을 했는데, 아이의 회복 자체를 보여줄 때는 이러한 표현을 최대한 배제하고 △몸무게가 얼마나 늘었는지 △현재 신체 활동 능력이 어떻게 되는지 등을 위주로 서술했다.

또한 취재 초기부터 굿네이버스, 세이브더칠드런 등 아동 인권 관련 기관의 조언을 받았다. 기사 작성 과정에서는 정운선 경북대 소아청소년정신의학과 교수 등 전문가들에게도 취재 내용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책 한 권 분량이 넘는 취재 내용 중에서 아동학대 피해자가 겪는 트라우마와 회복 과정에 대해서만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지난해 11월 한국기자협회, 보건복지부, 아동권리보장원이 함께 만든 ‘아동학대 언론보도 권고 기준’도 참고했다. 아동학대 사건을 보도할 때, 피해자, 신고자, 학대 행위 의심자를 특정할 수 있는 직장, 직업, 성별, 나이 등의 인적 사항을 되도록 보도 내용에 포함하지 않도록 권고했다. 혁재의 친모인 김유진(가명), 임훈석(가명)에 대한 내용은 기사의 목적과 부합하지 않는 경우 과감히 덜어냈다. 특히 미혼모 등 특정 대상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거나 가십거리로 읽힐 수 있는 대목은 어렵게 취재가 됐던 내용이더라도 과감히 삭제했다.
모든 아이에게 따뜻한 사회가 되길 바라며
어린이집에 다녀오자마자 준이(가명)에게 뽀뽀하는 아랑(가명). 아랑이처럼 사랑이 넘치는 연말이 되기를 기원한다.어린이집에 다녀오자마자 준이(가명)에게 뽀뽀하는 아랑(가명). 아랑이처럼 사랑이 넘치는 연말이 되기를 기원한다.
용기 있게 실명을 밝혀 준 박가람 씨와 정희재, 나종민 군에게 이 글을 빌려 감사를 전한다. 가명이지만 분명히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유준이, 혁재, 아랑이, 준이 소라에게도 독자들의 응원이 가 닿기를 바한다. 시베리아 공기에 갇혀 유독 추운 12월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아이들에게 따뜻한 눈길 한 번, 미소 한 번 지어줄 수 있는 연말이 되기를 바란다.



이 글은 <미아: 품을 잃은 아이들'> 시리즈 기사를 제작한 히어로콘텐츠 7기 팀원들이 쓰는 제작 후기입니다. 어떤 철학과 고민을 담아 기사를 제작했는지 독자 여러분에게 공유합니다. 다음 후기는 28일 오전 10시에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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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7~22·히어로콘텐츠 7기·
조유라 기자
조유라 기자|동아일보 히어로스쿼드

주로 교육을 취재했습니다. 사람을 바꾸고 구하는 것은 결국 사람임을 배웠습니다. 세상은 평범하고 다정한, 그래서 위대한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것임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