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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채왕’은 없었다

5개월간 불법사채의 세계를 취재하며 내린 결론
김호경 기자|동아일보 산업2부 2024-07-04 16:51:31
불법사채는 오래된 문제였다. 1997년 외환위기(IMF) 이래로 경기가 안 좋을 때마다 불법사채 피해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때마다 정부는 대책을 내고 언론은 불법사채 문제를 조명했다. 불법사채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는 차고 넘쳤다. 누적 관객이 4000만 명에 이르는 <범죄도시> 시리즈 최고의 빌런 장첸(윤계상)이 바로 불법사채 조직의 보스였다.
영화 <범죄도시>의 악당 장첸. 영화 <범죄도시>의 악당 장첸.
히어로콘텐츠 주제를 정하는 회의에 불법사채를 올린 건, 회사 선배의 한마디가 발단이었다. “요즘엔 수십만 원 빌려주고 수천%의 이자를 받는다더라.” 기사를 찾아보니 정말로 그랬다. 그땐 대통령이 정부 부처에 불법 사채 근절을 지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적어도 시의성 있는 주제라고 생각했다.

호기심도 한몫했다. 정말 영화처럼 불법사채의 배후에는 잔혹한 폭력조직이나, 검은돈을 주무르는 거물들이 있는 걸까. 기존에 나온 기사나 자료에서도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호기심이 증폭된 건 오랜만에 만난 취재원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였다. 부동산 업계에 몸담고 있는 그 취재원은 요즘 대부업계가 매우 어렵다고 했다. 법정 이자는 연 20%로 묶여 있는데 조달 금리가 오르면서 수익을 내기 어려워졌고, 특히 담보 없는 신용 대출은 취급할수록 손해라 신규 대출을 중단한 업체들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과거 TV에 광고하던 대형 대부업체들은 수년 전에 한국에서 철수하거나 사업을 축소했다는 사실도 이날 처음 알았다.
‘사채왕’을 찾아라
그러면 지금 돈이 급한 사람들한테 돈을 빌려주는 업자들은 도대체 누굴까. 언론 보도로 접한 불법사채 사건들은 ‘빙산의 일각’일 수도 있다는 의심이 싹텄다. 보이스피싱 상징이 된 ‘김미영 팀장’ 같은 거물이 불법사채의 세계에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채왕’으로 부를 만한 거물의 민낯을 드러낸다면 불법사채라는 뻔한 주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팀원들과 상의해 일단 취재를 시작했다.

전·현직 불법사채 조직원, 피해자 지원단체, 경찰 등 불법사채의 속살을 잘 알 것 같은 사람을 만나고, 판결문 등 자료를 살폈지만 좀처럼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몇몇 취재원들이 특정 인물을 ‘거물’로 지목했지만 근거가 빈약했다. 전해 들은 얘기였거나 주관적인 판단이 뒤섞여 사실을 발라내기 어려웠다. 그들이 지목한 인물의 진짜 이름을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 바닥에선 실명을 쓰지 않고 닉네임을 사용했는데, 한 사람이 여러 닉네임을 쓰기도 했다.
'김미영 팀장'으로 악명을 떨친 보이스피싱 조직 총책 박모 씨가 2021년 필리핀 현지에서 검거됐을 때 사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채왕으로 부를 만한 인물에 단서를 모았다. 한 남성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전국을 무대로 불법사채를 하다가 붙잡힌 남성이었다. 동종 전과가 있는데도 실형을 피했다. 한 취재원은 그가 거액의 수임료를 내고 호화 변호인단을 꾸린 덕분이었다고 했다. 다른 취재원은 그가 비대면 불법사채의 ‘원조’이며 지금도 불법사채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말이 사실이길 간절히 바라며, 한 달 넘게 그의 흔적을 쫓았다. 과거 사건의 공범부터 지인, 가족까지. 취재팀이 이름과 주소를 아는 이들은 모두 접촉했다. 하지만 그를 사채왕으로 확실하게 지목할 만한 ‘스모킹건’은 찾지 못했다.

오히려 의문만 커졌다. 엉뚱한 사람을 몰아가는 건 아닌지, 사채왕이 있긴 한 건지 혼란스러웠다. 불법사채의 조직은 대개 점조직이라 보스의 진짜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과거 조직폭력배처럼 계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들이예요.”
이런 생리를 잘 아는 취재원은 취재팀이 헛다리를 짚고 있다고 에둘러 말했다. “비대면으로 소액 빌려주는 불법사채는 주로 평범한 사람들이 해요. ‘명동 사채왕’ 같은 사람들은 이런 거 절대 안 합니다.”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였다. 막대한 자금을 가진 ‘큰손’이라면 굳이 일반인을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기업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큰 이권이 걸린 사업에 투자하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취재 방향을 전면 재검토했다. 사채왕을 쫓는 건 중단하기로 했다. 대신 피해자로 눈을 돌려 불법추심에 시달리다 자살한 사람을 찾기로 했다. 불법추심이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트리는 과정을 낱낱이 취재해 불법사채 문제를 고발하자는 계획이었다.

얼마 안 가 다시 난관에 부딪혔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불법사채를 쓴 사례는 있었지만, 자살의 주된 원인이 생활고 때문인지, 악랄한 불법추심 때문인지를 가릴 만한 객관적인 근거 자료가 없었다. 고인의 사연을 자세히 아는 사람을 찾아도 인터뷰에 응해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얼마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생활고로 인한 자살자는 가족이나 지인 등 사회적 관계가 단절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원하는 내용을 취재하지 못할 가능성이 너무 커 보였다. 다시 방향을 수정했다.
두 번의 시행착오
이번엔 불법사채 피해자와 가해자가 만나는 ‘접점’에 주목하기로 했다. 그 접점이 바로 온라인 대부중개 플랫폼이었다. ‘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 시리즈의 메인 재료가 정해진 순간이었다. 그때가 벌써 3월 중순이었다.
히어로콘텐츠 ‘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 첫회 지면. 히어로콘텐츠 ‘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 첫회 지면.
그간 취재한 내용 중 쓸 만한 것들을 골라냈다. 플랫폼에서 불법사채를 접한 피해자 사연과 불법사채 조직들이 이곳에서 피해자를 유인하고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취재된 상태였다. 일반 기획기사라면 충분한 수준이었지만 오랜 시간을 들여 취재한 결과물이라고 하기엔 아쉬움이 남았다. 요리에 비유하면 ‘시그니처’ 메뉴가 필요했다. 재료가 새롭지 않다면 특제 비법 소스라도 곁들여야 했다.

그 실마리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얻었다. 취재팀은 지난해 정부의 플랫폼 합동점검에 참여했던 한 실무자를 만났다. 그는 점검 당시 상황을 자세히 들려줬다. 특히 플랫폼 이용자의 연락처가 유출되는지 확인한 방법이 인상적이었다. 업무용 휴대전화로 대출 이용자인 척 대출을 문의했다고 했다. 이른바 ‘미스터리 쇼퍼’ 방식이었다.

취재에 접목하면 꽤 요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재팀이 그때까지 만난 불법사채 피해자 상당수가 “정식 대부업체가 플랫폼에 올린 광고를 보고 연락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왜 불법사채로 연결됐는지는 알지 못했다. 미스터리 쇼퍼 방식을 접목하면 그 ‘연결고리’를 특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를 남기기 위해 새 휴대전화를 개통하고, 번호 1개로 업체 1곳에만 문의하는 ‘일회용 원칙’을 세웠다. 그렇게 취재팀은 플랫폼 광고 업체 62곳 중 36곳(58%)이 불법으로 연결됐다는 핵심 팩트를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취재팀이 새로 개통한 휴대전화들취재팀이 새로 개통한 휴대전화들
취재를 마치며
불법사채를 주제로 정한 뒤 기사를 출고하기까지 5개월이 걸렸다. 돌이켜보면 매 순간 실패의 연속이었다. 취재팀이 세운 가설은 현실과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결과물은 노력에 비례하지 않았다. 때론 노력보다 운이 더 크게 작용했다. 취재 계획은 번번이 틀어졌다.

그럴 때면 세계적인 복서 마이크 타이슨의 명언이 떠올랐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갖고 있다, 나한테 맞기 전까지.” 물론 맞는 쪽은 취재팀이었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계획을 수정했고 어느샌가 빛이 보였다. 그렇게 프로젝트는 무사히 마쳤다.
트랩 3회에서 다룬 불법사채 조직 총책 ‘강 실장(가운데)’ 항소심 법정 스케치. 트랩 3회에서 다룬 불법사채 조직 총책 ‘강 실장(가운데)’ 항소심 법정 스케치.
이번 취재로 불법사채의 민낯에 대한 궁금증도 풀 수 있었다. 서민의 고혈을 빨아내는 불법사채의 세계에 ‘사채왕’은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왕이 존재할 수 없는 세계였다. 왕위에 오르고 그 권력을 유지하려면 남과 다른 ‘비범함’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이 바닥에선 두둑한 밑천이나 인맥, 기술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도 마음만 먹으면 불법사채 조직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다. 아무나 왕이 될 수 있는 세계, 그래서 아무도 왕이 아닌 세계. 그 ‘평범함’이 사채왕보다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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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경 기자
김호경 기자|동아일보 산업2부

2012년 입사해 산업, 사회정책, 부동산, 사건사고 분야를 취재했습니다. 사람들의 욕망과 두려움을 이해하고 쓰려고 노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