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같이 있으면 안 되겠냐.”

2018년 어느 가을 날, 김모 씨(51)의 병실로 아버지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느 때처럼 아버지께 문안 인사를 드리고 병실로 돌아온 직후였다. 벌써 한참 동안 같은 병원, 다른 층 병실에 입원 중인 부자(父子)의 하루하루는 평안할 리 없었다. 이날따라 아버지가 건넨 부탁이 김 씨에게는 더 유난스럽게 느껴졌다. 매일같이 “병실이 답답하다”, “집에 가고 싶다”고 보채던 아버지였다. 김 씨는 “아유, 됐어요 아버지. 지금 규정상 병실 간 이동이 안 되는 시간이에요”라고 타이르듯 수화기를 내려놨다.

몇 시간 뒤 병원 관계자가 “지금 빨리 와보셔야겠다”며 헐레벌떡 김 씨를 불렀다. 아버지가 병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86세 고령에 중증 폐렴으로 투병 중이던 아버지는 병마와의 전투에서 스스로 물러나버렸다.
김 씨의 어머니는 가족을 못 알아볼 정도의 중증 치매로 오래전부터 요양원에 입원해 있던 터라 충격은 김 씨 혼자 오롯이 감내해야 했다. 20대부터 계속된 결핵 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퇴원을 불과 며칠 앞둔 날이었다.

김 씨의 인생은 온통 병마와의 싸움이었다. 어려서부터 결핵을 심하게 앓아 일상생활이 힘들었다. 세 번의 큰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 김 씨는 “독한 약을 하도 먹어서 가슴이랑 배랑 다 문드러졌지. 남들처럼 오래 직장에 다니거나 가정을 꾸리는 건 생각도 못 해봤어”라고 말했다.

김 씨는 20대 때부터 결핵 치료를 위해 전남 목포에 있는 국립결핵병원을 오갔다. 아버지의 폐렴 수발을 들면서 본인의 병도 챙겨야 하는 이중고였다. 병세가 잠시 나아지면 식당일, 옷 장사 등 돈이 되는 일은 가리지 않고 했다. 수입은 변변치 않았어도 아버지 병원비와 어머니 요양원비를 벌어야 했기에 꿋꿋하게 버텼다. 그런 그를 버티게 한 동력, 아픈 아버지가 사라진 순간 그는 무너져 내렸다.

“충격을 말로 다 할 수 없었죠. 이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어요. 모든 미련이 사라져버렸다고 해야 하나.”
김 씨 본인의 병세는 호전돼 원래 일하던 유통회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삶이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굳이 돌아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냥 여기저기 떠돌기 시작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와는 연락이라는 게 무의미했다. 그나마 연락하던 친척과도 연락을 끊었다. 3년간 여기저기 떠돌다 미래고시텔까지 흘러왔다.

이 세상과 단절하고 싶었는데, 다 끊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정착하면서 예기치 못한 끈이 생겼다. 근처에 있는 삼일교회 사람들의 권유로 예배에 나가기 시작하면서다. 유일하게 마음을 붙인 이곳에서 그는 유통회사 근무 경험을 살려 사무 업무를 돕고 있다.

김 씨가 스스로를 가뒀던 103호는 이제 그에게 제2의 세계가 되고 있다. 방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선반 위에 놓인 어버이날 축하 카네이션 조화와 한 장의 사진이 새로운 인생을 보여준다. 교회에서 알게 된 지인의 자녀와 김 씨의 웃는 모습이 사진에 담겨 있다. 김 씨는 “얘요? 당연히 친딸은 아니죠. 저는 이제 가족이 없는데요. 그래도 그냥 딸내미라고 불러요. 저한테 아버지라며 꽃도 주는 걸요. 정말 이쁘죠?”라며 환하게 웃었다.
가족으로부터 발버둥쳐 떠난 곳에서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증발 끝에 새 인생을 만든 김 씨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저 같은 사람들은 대개 힘든 상황이 본인 탓이라고 생각해요. 질긴 질병도, 가난한 생활도. 저도 그랬죠. 그런데 이제는 사회 문제도 있다고 생각해요. 개개인이 너무 힘든 순간에 사회가 구조적으로 도울 장치가 있다면… 그렇다면 저도 이 삶을 살진 않았을 수도 있죠. 물론 본인 탓으로 잘못된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끝내 우리 같은 사람들을 고립시켜 버리는 건 사회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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