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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K팝 아이돌’을 선택한 이유

취재팀이 세운 다섯 가지 원칙
김도형 기자|산업1부 2021-09-28 10:18:04
편집자 주: Inside 코너는 디오리지널 기사의 ‘작품 해설서’입니다. 누가 무슨 생각을 갖고, 어떤 과정을 통해 기사를 제작했을까요? 농산물의 원산지와 수확자, 쉐프의 철학을 알면 음식을 더욱 깊이 있게 음미할 수 있듯이 제작자의 땀과 고민을 엿보며 기사를 한층 더 풍부하게 즐기길 기원합니다. 거창한 성과를 소개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때로는 아쉬움과 불완전함 속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며 한 발자국씩 나아가려 했던 흔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독자 여러분이 디오리지널이라는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을 더 깊이 있게 감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히어로콘텐츠팀 3기 기자들의 회의 모습. 왼쪽에서 네 번째가 필자다. The Original Content히어로콘텐츠팀 3기 기자들의 회의 모습. 왼쪽에서 네 번째가 필자다.
아직 날씨가 쌀쌀하던 2021년 2월 17일, 세 번째로 꾸려진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의 취재기자 4명이 회사 3층 회의실에 처음 모였다.

히어로콘텐츠팀은 동아일보가 2020년 창간 100주년을 맞아 펴낸 뉴스룸 혁신 보고서의 제안을 바탕으로 처음 시작됐다. 스쳐 지나가는 보도가 아니라, 독자의 머리와 가슴에 더 오래 머물며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보도를 목표로 세운 새로운 조직. 여러 부서에서 일하던 기자들을 따로 뽑아서 꾸려진 취재팀이 자신의 출입처를 완전히 벗어나 원하는 아이템으로 수개월에 걸쳐서 취재하고 보도할 수 있는 곳이다. 먼저 꾸려졌던 두 기수의 히어로콘텐츠팀은 각기 3~4개월에 걸친 작업으로 ‘증발’(자발적 실종자)과 ‘환생’(장기 기증)이라는 제목의 보도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상황이었다.

'우리도 좋은 보도를 이어가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모인 3기 취재팀 최대의 관심사는 보도 아이템이었다. 첫날부터 무엇을 보도할 것인지를 놓고 가벼운 토론이 벌어졌다. 물론 금세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이날 시작된 3기 히어로콘텐츠팀의 활동은 다섯 달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이 가운데 거의 한 달 가까운 시간이 ‘무엇을 취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데 소요됐다.
취재팀이 세운 다섯 가지 원칙
히어로콘텐츠팀의 전용 사무실에 비치된 화이트보드 모습. 취재팀이 마련한 다섯 가지 원칙을 써두고 항상 점검했다. The Original Content히어로콘텐츠팀의 전용 사무실에 비치된 화이트보드 모습. 취재팀이 마련한 다섯 가지 원칙을 써두고 항상 점검했다.
취재 아이템을 놓고 브레인스토밍을 겸한 회의가 이어지던 첫 1주일에 취재팀은 어떤 취재와 보도를 할 것인지에 대한 원칙을 먼저 만들었다. ‘이 아이템이 좋을까? 저 아이템이 좋을까?’를 막연하게만 고민하지 말고 취재팀 전체가 지향하는 ‘공통된 지점’에 먼저 합의하자는 생각이었다.

히어로콘텐츠팀의 취재 아이템 선택에는 많은 자유가 주어져 있었다. 그럴수록 나름대로의 기준을 만들어 놓는 것이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일 수 있다는 생각. 나중에 취재팀 내부에서 아이템 결정을 놓고 의견이 엇갈릴 때 이런 원칙이 중심을 잡아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취재팀은 토론을 거쳐 △살아있는 현장 △실명의 주인공들 △몰랐던 사실·디테일 △현재를 관통하는 메시지 △긴, 고밀도의 취재라는 다섯 가지 원칙을 세웠다. 살아있는 현장과 실명의 주인공이라는 원칙은 생생한 시각물과 관찰을 중심에 둔 취재를 통해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구현해 보자는 목표를 위해 꼭 필요한 요소였다. 새로운 사실과 디테일을 취재해서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지자는 것은 모든 보도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친 밀도 높은 취재가 필요한 것이 당연했다.

3층 회의실의 커다란 화이트보드의 왼쪽 위에 써놓은 이 5가지 원칙은 활동을 완전히 끝내는 날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좁아진 이슈’를 벗어나보기
취재팀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K팝 아이돌’은 3월 11일에야 처음 아이디어로 던져졌다. 2021년 한국에서 너무도 익숙한 단어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생소한 아이템. 그 생소함의 크기만큼, 동아일보 같은 미디어가 진지하게 다뤄본 적이 없는 소재라는 신선함이 느껴졌다. 일단 기존과 ‘색다른’ 아이템이 될 수 있다는 장점이었다.

이런저런 아이템을 고민하다 ‘K팝 아이돌’까지 생각하게 된 배경에는 “기사는 늘어났지만 이슈는 좁아진” 현재의 상황에 대한 고민도 깔려 있었다. 언론 매체가 늘어나고 그에 따라 뉴스도 폭발적으로 많아졌지만 정작 독자들은 뉴스를 제공하는 미디어를 점차 떠나고 있는 것 아닐까.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그동안 보도할 수 있는 콘텐츠의 범위를 스스로 너무 좁혀온 결과 아닐까. 취재팀은 이런 의문을 품어 봤다.

일단, 취재팀은 2021년에 한국은 물론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K팝 열풍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면서 ‘우리가 진지하게 들여다 볼 대상’으로는 여기지 않았던 것일 수 있다는 생각까지를 공유했다.
현재를 관통하는, 감각적·세계적 콘텐츠
‘K팝 아이돌’이라는 아이템에는 장점이 꽤 있었다. 세계적인 현상으로 떠오른 K팝 열풍을 현장에서 취재한 기록물로 남길 수 있다는 점은 무엇보다 큰 강점이었다. 상업적인 제작물이 아니라 보도를 목적으로 장기간 취재하고 이를 그대로 전달할 수 있다면 두고두고 읽을 수 있는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기대였다. 한번 소비되고 사라지는 콘텐츠가 아니라 언제든 ‘역주행’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어쩌면 막연한 ‘희망사항’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목표였다.

해외 독자에게 충분히 읽힐 수 있는 아이템이라는 점도 눈에 띄었다. K팝이 세계적인 문화현상이 된 상황에서 무대 뒤의 이야기는 해외 K팝 팬들에게도 큰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소재라는 생각이었다. 국내에 비해 무대 뒤 이야기에 대한 노출도가 낮을 수 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해외 독자를 향한 소구력은 생각보다 클 수 있었다. 히어로콘텐츠팀이 6편의 기사를 모두 미리 영문으로 완전하게 번역하고 국문, 영문 기사를 동시에 오픈한 이유다.

‘K팝 아이돌’의 주변부가 아니라 당사자를 직접 취재하는 것에 성공할 수 있다면, 아이돌 그룹의 화려한 모습과 무대 뒤의 모습을 통해 시각적으로 뛰어난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컸다. 디지털 저널리즘의 지평을 넓혀보자는 히어로콘텐츠팀의 목표를 감안했을 때 상당히 매력적인 대목이었다.
새롭지 않은 소재를 취재하는 일의 위험성
아이돌 생태계를 둘러싼 다양한 면모를 펼쳐놓고 브레인스토밍 회의를 진행할 당시 화이트보드 모습. The Original Content아이돌 생태계를 둘러싼 다양한 면모를 펼쳐놓고 브레인스토밍 회의를 진행할 당시 화이트보드 모습.
장점만 가득한 소재 혹은 주제를 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K팝 아이돌’은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어쩌면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새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아이돌 그룹을 직접 취재하는 것을 목표로 했을 때, 어떤 장·단점을 가진 기사가 될지를 미리 느낄 수 있었다.

1세대 아이돌의 시작으로 꼽히는 ‘H.O.T.’가 데뷔한 1996년으로부터 25년. K팝 아이돌은 이제 여러 세대로 구분될 정도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국내 독자들은 그들의 흥망성쇠를 긴 시간 동안 바로 옆에서 지켜봐 왔다. 그들 각자가 성공을 위해서 얼마나 몸을 던져 노력하고 어떤 성공과 좌절을 마주하는지 역시 익히 알려진 이야기였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최근 수년 동안 스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돌 지망생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기자의 업은 사실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 것과 거의 같다. 익숙한 소재,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라면 기사로서의 매력이 크게 떨어질 우려가 있었다.
다섯 가지 원칙에 다시 비춰본 아이템
‘K팝 아이돌’이라는 아이템이 얼마나 새로운 이야기일 것이냐에 대한 걱정과 더불어 어떤 주제의식으로 접근해 볼 것이냐에 대한 생각도 확실하지 않았던 그즈음. 취재팀은 미리 설정했던 다섯 가지 원칙에 이 아이템을 비춰봤다.

살아있는 현장과 실명의 주인공들을 등장시킬 수 있는 기사가 될 수 있으리라는 점은 확실했다. 몰랐던 사실과 디테일로 2021년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지겠다는 원칙은 어떨까. 취재팀은 이 원칙이 꼭 ‘아무도 몰랐던 사실’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공감했다. 알고 있는 것 같은 세계일지라도 새로운 디테일과 관점을 발견해내고 독자들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라면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아이돌 그룹 당사자를 직접 취재하는 방향을 생각한 취재팀은 잘 섭외해서 충분히 취재할 수만 있다면 이 다섯 가지 원칙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이템을 결정한 다음에도 이 다섯 가지 원칙은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취재·보도의 방향을 어느 정도 예고해주는 역할이었다.

사실, ‘K팝 아이돌’은 이미 상당한 지식과 시야를 가진 일반인과 전문가가 많은 영역이다. 다섯 가지 원칙에 비춰보면서 취재팀은 이 아이템을 취재하는 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던 ‘뉴스’를 발굴하는 작업이 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재팀은 의미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 될 수 있다면 좋은 기사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K팝 아이돌’의 세계로 본격적으로 진입했다.
뿌듯함과 아쉬움 사이에서…
2월에 만들어진 3기 취재팀은 7월에 결과를 내놓고 활동을 마무리 지었다. 취재팀은 K팝 아이돌의 세계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인물과 장면을 중심에 둔 여러 편의 이야기를 ‘99℃:한국산 아이돌’이라는 제목의 보도로 풀어냈다.

국내·외에서 많은 독자들이 호응해 주면서 뿌듯함도 느꼈지만 다섯 달이라는 긴 시간에 걸친 작업의 결과물로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미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고 있는 세계를 취재팀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게 그려냈는지, 한국 특유의 방식으로 길러지면서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독자들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가 됐는지 등도 모두 큼지막한 물음표로 남아 있다.

새로운 작업을 시도해 본다는 어떤 설렘(!)으로 취재를 시작했던 3기 히어로콘텐츠팀은 여러 갈림길에서 기존과 조금은 다른 길을 선택해 봤다. 하지 않은 선택에 대한 아쉬움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여러 선택 앞에서 했던 고민 그 자체에서도 취재팀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3기 취재팀은 처음에 스스로 세웠던 다섯 가지 원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까지는 도착했다고 믿는다.

이런 과정을 경험한 취재팀이 다시 ‘2월 17일’의 상황으로 돌아가 여러 달의 시간을 얻을 수 있다면 이번에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아이템을 선택하고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다섯 달이라는 긴 과정을 완전히 끝내고 가끔씩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질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질문은, 앞으로 기자로 일하면서 ‘좋은 기사’를 위해 계속 던져봐야 할 힘든 숙제가 될지도 모르겠다.
김도형 기자
김도형 기자|산업1부

2011년 여름. 좋은 기사로 세상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동아일보에 입사했습니다. 그리고 10년. 신문과 방송(채널A)을 오가며 경찰, 교육, 외교·통일·국방, 국회, 스포츠, 산업 분야를 취재했습니다. 덜 좋은 기사를 쓰는 날이 있을지언정 나쁜 기사를 쓰는 날만큼은 없어야 한다는 마음을 지켜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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