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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를 듣기 위한 5개월의 여정

경기 안산 현장 취재의 중요성
신희철 기자|동아일보 사회부 2022-02-07 08:56:04
“너 한국인이었어?”

이 말은 히어로콘텐츠팀 4기가 무려 5개월가량을 준비해 보도한 ‘공존 : 그들과 우리가 되려면’ 시리즈 1회의 첫 문장이다. 전교생 449명 중 한국인이 6명에 불과한 경기 안산원곡초에서 만난 한 이주배경 학생은 친구 양주원(12)에게 이렇게 물었다. “주원이가 한국인인거 알았어요?”라는 취재팀의 질문에 깜짝 놀라 되물은 것이다. 친구가 된 지 3년 만에 안 사실이라고 했다.

기사뿐만 아니라 책, 다큐, 영화 등 콘텐츠 제작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첫 문장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안다. 무엇을 앞세워야 궁금증을 자아내고 몰입감을 줄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기 때문이다. 첫 문장으로 쓸 수 있는 멘트를 발견했을 때의 짜릿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너 한국인이었어?”라는 말을 듣기까지
취재팀 역시 그동안 들었던 수많은 말 중 신선했던 것을 고르고 골랐지만 “너 한국인이었어?”가 압권이었다. 이주민에게 이 같은 말을 들어본 적이 없을 ‘한국인 어른들’이 상상하지 못할 멘트였다. 대한민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주민과의 공존은 피할 수 없는 미래’라는 문제의식을 보여주기에도 적합했다. 또 아이들은 이미 국적을 신경쓰지 않고 잘 어울리고 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어른들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할 수 있었다.

짧지만 강렬한 이 멘트는 현장 취재 막바지에 얻어낸 것이다. 취재팀이 경기 안산에 처음 간 것은 지난해 8월 23일. 원곡초에 처음 가서 교장 선생님을 만난 건 10월 14일이었다. 안산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교육 문제에 집중하고, 그 중에서도 원곡초를 발견하기까지 이미 한 달 반가량의 시간이 걸렸다.

이후 교장 선생님을 비롯해 교감 선생님, 다문화부장 선생님, 담임 선생님 등을 수차례 만나 설득한 끝에 학교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입장권’이 주어졌다. 당시 학교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잇따라 나와 선생님들은 매우 조심스럽고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학부모들에게 일일이 동의서를 받고 나서야 인터뷰와 제한적인 사진 촬영이 가능했다. 코로나19 확진자 발생으로 취재 일정은 변경되기 일쑤였다. 취재팀은 아예 학교 빈 교실에 ‘기자실’을 차리고 상주하면서 어떻게든 학생 한 명, 선생님 한 명이라도 더 만나려고 했다. 일부 수업 참관도 어렵게 허락받아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기도 했다.
2021년 11월 19일 경기 안산원곡초에서 취재팀 전원이 빈 교실에 모여 인터뷰를 준비하던 모습. 왼쪽부터 필자, 김재희 기자, 이새샘 기자, 남건우 기자.2021년 11월 19일 경기 안산원곡초에서 취재팀 전원이 빈 교실에 모여 인터뷰를 준비하던 모습. 왼쪽부터 필자, 김재희 기자, 이새샘 기자, 남건우 기자.
“너 한국인이었어?”라는 멘트를 들은 건 지난해 12월 17일. 8월부터 일주일에 평균 3, 4일씩 안산을 오가던 취재팀은 이날도 어김없이 원곡초를 찾았다. 6명에 불과한 한국인 중 1명인 주원이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였다. 취재팀은 이미 11월에 주원이를 만났고, 12월 초에는 주원이 어머니까지 인터뷰해서 ‘왜 이주민이 많은 학교에 보내는지’ ‘장단점은 무엇인지’ 등을 파악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더 신선한 멘트, 더 재미있는 스케치거리를 찾아나선 길이었다.

이날 오후 1시 하굣길에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자 취재팀은 주원이와 그의 친구들을 따라 다녔다.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노는 과정에서 나오는 말이나 행동에 주목했다.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던 주원이는 본인이 생각지도 못한 ‘국적 공개’를 했다. 취재팀의 질문을 받은 이주배경 아이가 “지금 알았어요. 주원이도 다른 나라에서 왔다고 생각했다”며 “너 한국인이었어?”라고 말한 것이다. 떡볶이를 입안 가득 넣고 오물거리던 주원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취재팀은 아이들의 말과 하굣길 동선을 통해 인근 새아파트 단지에서 원곡초를 보내는 한국인 학부모가 거의 없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새아파트로 이사 갔는데 원곡초 다니는 친구는 한 명도 없어요”라던 주원이의 말, 하굣길에 대부분의 이주배경 아이들이 노후화된 다세대·다가구 주택 밀집 지역으로 걸어가던 모습을 당일 현장에서 포착했다.

아이들의 말과 행동은 공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뚜렷하게 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원곡초가 위치한 원곡동 일대 ‘한 마을’에 ‘가치관이 다른 두 세계가 있다’는 팩트를 증명할 근거가 더욱 풍성해진 것이다. ‘한 마을 두 세계’란 사실은 ‘원곡에는 국경이 있다’ 는 1회 제목을 뽑아내는 데 큰 영향을 줬다.
군입대를 코 앞에 둔 ‘주인공 후보’와의 짧고 굵은 만남
원곡초 취재 경험은 현장을 오랫동안 자주 찾는 것의 중요성을 알게 해줬다. 장기 프로젝트의 장점을 활용해 현장을 갈 수 있을 때까지 가는 게 분명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제한된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 역시 중요했다. 해병대 입소를 코 앞에 둔 취재원과의 만남에선 얻은 것이 많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공존 시리즈 4회 주인공인 ‘인도네시아계 한국인’ 윤대성 씨(20)를 처음 만난 건 지난해 10월 13일이었다. 한국인 아버지와 인도네시아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대성 씨가 해병대를 자원했다는 점이 독자들의 흥미를 끌 것 같았다. 직접 만나본 대성 씨는 여러 언어와 문화에 익숙한 점에서 ‘다중정체성 세대’를 대표할 만한 ‘주인공 후보’로 느껴졌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대성 씨의 해병대 입소일은 10월 25일. 인터뷰와 추가 취재를 할 수 있는 기간이 2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더군다나 입대 전에 인사할 사람이 많은 대성 씨의 시간을 계속 뺏을 수도 없었다. 짧지만 굵은 만남이 필요했다.
2021년 10월 23일 안산 대부도에서 윤대성 씨와 친구들을 취재하던 현장에서 필자가 촬영한 동료들. 왼쪽부터 김재희 기자, 남건우 기자, 송은석 기자.2021년 10월 23일 안산 대부도에서 윤대성 씨와 친구들을 취재하던 현장에서 필자가 촬영한 동료들. 왼쪽부터 김재희 기자, 남건우 기자, 송은석 기자.
10월 18일 대성 씨와 2차 인터뷰를 하고, 23일에는 그를 하루 종일 따라 다녔다. 당일 오전 대성 씨 집을 방문해 가족 사진, 인도네시아 고교 졸업장 등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취재팀을 나눠 일부는 대성 씨 어머니와 인터뷰를 하고, 나머지는 대성 씨가 미용실에서 머리를 짧게 미는 모습도 스케치했다. 오후에는 대성 씨 친구들과 안산 대부도 여행을 갔다. 함께 해물칼국수를 먹고 바닷가 산책도 했다. 25일 입소 당일에는 경북 포항의 해병대 교육훈련단까지 따라갔다. 입소 직전까지 대성 씨의 말과 행동을 기록했다.

짧고 굵은 만남의 성과는 분명했다. 대성 씨가 ‘해병대는 이곳에서 시작된다’는 간판 앞에서 경례를 하는 모습은 4회 메인 사진으로 일찌감치 확정됐다. 대성 씨와 어머니가 포옹하는 장면, 인도네시아 친구들과 영상 통화를 하는 장면은 감동과 재미를 더했다. 대부도를 따라간 덕분에 대성 씨 친구들을 인터뷰할 수 있었고, 해병대를 따라가서 대성 씨 어머니, 누나와도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아쉬운 점도 많이 남았다. 대성 씨를 만나는 매 순간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한 마음으로 취재했지만, 디테일한 취재 포인트를 놓친 것도 많았다. 대성 씨가 해병대를 지원한 이유를 좀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들어보는 것부터 학창 시절의 기억, 미래 계획까지 추가 취재가 필요한 것들이 계속 나왔다. 가족과 친구들을 통해 보완해나갔지만, ‘그 때 이렇게 물어볼 걸’하는 아쉬움이 많았다.

기자가 된 이후로 이렇게 오랫동안 한 가지 아이템을 취재해 본 적이 없다. 이번 기회에 배운 점은 ‘현장에 답이 있다’는 뻔하지만 중요한 사실이다. 또 주어진 시간이 많더라도 ‘현장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매일 최선을 다하는 노력은 단기 프로젝트든 장기 프로젝트든 상관없이 중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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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철 기자
신희철 기자|동아일보 사회부

신뢰받는 기자를 목표로 2012년부터 부동산, 유통, 산업, 사회 분야를 취재했습니다. 기자는 취재한 내용을 잘 정리해서 전달하면 된다고 생각해왔는데, 히어로콘텐츠팀을 통해서 '스토리'의 중요성을 알게 됐습니다. 전형적인 기사 틀을 깨고 ‘탁월한 이야기꾼’이 돼 보겠습니다.